1. 채식주의자
이 소설은 총 세 명의 시점에서 바라본 주인공 영혜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첫 번째인 채식주의자에서는 영혜의 남편이 화자로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솔직히 말하면 이 지점이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를 가장 혼란스럽게 만든 주요인이었다. 객관적인 사실만을 놓고 본다면 분명 이건 어딘가 이상하고 잘못된, 정상적이지 않은 상황 같은데 화자는 이를 아무렇지 않게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담담하게 서술한다. 이 책의 주인공과 이야기를 서술하는 화자가 다르다는 점에서부터 나는 누구에게 나를 이입해서 이야기에 따라가야 할지, 누구에게 동화되어 이 책 속 세계를 바라봐야 할지가 너무 혼란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주인공과 화자가 같은 입장에서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 서로 상충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이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처음 혼란스럽기 시작했던 건 영혜의 남편이 자신의 아내를 서술하는 부분부터 묘하게 불쾌감이 들었을 때부터였다. 그는 영혜가 특별한 매력도 없고 무난한 성격에 아주 평범한 여자이지만 자신의 열등감을 건드리지 않을 것이며 ‘아내’로서의 역할은 아주 착실히 수행해 줄 것이라 생각했기에 그녀와 결혼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부터 나는 왠지 모를 불쾌감이 느껴졌지만 그와는 별개로 머리로는 이러한 결혼의 형태가 아주 현실적이고 일반적인 것이라고, 불쾌감이 들 이유가 없다고 생각을 했다. 어떻게 보면 낭만은 좀 없지만 합리적인 선택이라고도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난 뒤, 영혜의 삶의 결말을 보고 난 뒤에 나는 이것을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여겼던 내가, 이 사회가 너무나 이상하게 느껴졌고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확신했다.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남편은 영혜를 사랑하지도 딱히 애정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면서 그저 밥과 빨래를 대신해 주고 집안일을 도맡아 하며 원할 때면 섹스를 해주고 자신의 수발을 들어줄 순종적인 누군가가 필요했기에 그녀와 결혼을 한 것이다. 그는 영혜를 동등한 위치의 부부로서 딱히 존중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았으며, 하물며 영혜를 같은 인간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요구하는 역할을 수행해 줄 일상의 부속품 정도로 생각한 것이다. 또한 그것을 잘 수행해 주는 대가로 일부분 금전적 보상을 하는 형태의 ‘거래’로서 이 결혼을 선택했다. 이 모든 것은 둘의 첫 만남부터 결혼 생활의 마지막까지 드러나는 영혜를 향한 남편의 무관심이 증명해 준다. 그는 가족으로서, 아내로서, 같은 인간으로서의 영혜를 조금도 궁금해하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는 그녀만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영혜가 갑자기 채식을 한다고 했을 때 그는 얼마나 당황스러웠겠는가. 잘 작동하던 나의 일상의 부속품이 평소 예상 범주에서 벗어나 갑자기 평범하지 않은 행동을 했을 때 그는 어쩌면 배신감 같은 감정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궁금했던 건 영혜였다. 그녀는 왜 남편과의 결혼을 결심했는지, 정말로 남편의 묘사처럼 아무런 매력도 특징도 없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그런 사람인지, 그리고 왜 갑자기 채식을 하게 되었으며 그 원인이었던 꿈은 어떤 의미였던 건지. 이러한 의문들은 책을 읽다 보니 자연스럽게 풀렸던 것 같다. 그녀는 엄하고 가부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영혜가 고기를 먹지 않자 그녀에게 폭력을 가하고 고기를 먹을 것을 강요하는, 그것을 가정교육 또는 훈육으로 정당화하며 어린 시절부터 가정폭력을 휘둘렀을 그런 아버지의 밑에서 자란 것이다. 영혜가 매력도 특징도 없는 무색채의 무난한 사람처럼 보였던 건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결혼이 선택지가 된 현시대와 달리 그 시절엔 선택이 아닌 필수였기에 영혜에게 결혼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결혼을 할 수밖에 없었고 폭력적이며 억압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 자신의 개인적 취향이 어떤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등을 딱히 깊게 고민해 보지 못한 것이 아니었을까.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선택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명확했으며 그것에 반항할 수도, 자신의 주관을 가질 수도, 감정을 표출할 수도 없었던 것이 아닐까.
영혜가 채식을 하게 된 원인이었던 꿈은 아마도 그녀가 평생을 자신도 모르게 노출되어 있었던 폭력을 의미한다고 느꼈다. 그녀의 꿈에서 가축들은 죽임을 당하고 피를 흘렸으며 인간들은 그런 가축을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게도 잡아먹었다. 꿈속에서 가축들은 무력했으며 인간들은 포식자였다. 당연하게 폭력을 휘두르고 살육을 하는 포식자. 영혜는 꿈속 가축들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으리라. 그렇기에 그녀는 도저히 육식을 할 수가 없었으리라. 그녀에게 육식은 곧 폭력이었고 더 이상은 폭력을 견딜 수 없었기에. 채식을 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과거의 폭력은 아버지에 의한 것이었다면 현재는 남편에 의해 지속되었다. 아내인 자신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폭력. 그녀의 남편은 영혜에게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기계의 부품처럼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해내면 그뿐인 그런 정도의 존재로 여겼다. 그렇기에 남편은 영혜가 채식을 시작하며 그가 생각했던 그녀의 도리와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게 되자 그녀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행동의 원인이 무엇인지, 그녀가 어떠한 생각을 하는지에 대해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 부품으로서의 제 역할 다 하지 못한 그녀를 버릴 뿐이었다. 이 모든 것이 영혜에겐 폭력이었다. 공포스러운 지점은, 그녀의 아버지와 남편은 자신이 폭력을 휘두른다는 것을, 매 순간 영혜를 죽이고 있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른다는 것이다. 마치 영혜의 꿈속에서 아무런 죄의식 없이 당연하게 가축을 죽였던 포식자처럼.
2. 몽고반점
이 부분부터는 주인공인 영혜의 형부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솔직히 말하면 읽는 동안 이 부분이 너무 역겨워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형부라는 인물의 시점을 겪어보니 마치 내가 알고 있던 윤리의식이나 도덕심, 혹은 그런 거창한 것이 아니더라도 인간으로서의 일말의 부끄러움, 수치심, 양심 이런 것들이 모조리 다 무의미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영상물을 작업하는 예술가이다. 이런 요소 때문에 아주 약간은 혼란스러웠던 것이 그가 그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서술하면서 모든 것을 다 예술의 일부로서 ‘이 행위는 예술을 위해서라면 마땅히 해야만 하는 것이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라며 정당화하고 죄의식을 지워버렸기 때문에 예술을 잘 알지 못하는 나의 입장에선 정말 예술의 세계 안에선 그 어떤 것이라도 모두 허용되는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객관적인 사실만을 놓고 본다면 그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자신의 처제와 섹스를 하고 그걸 영상으로 촬영한 인간 말종, 짐승만도 못한 쓰레기일 뿐인데도 말이다. 자신의 아내를 두고, 심지어 자식까지 있는 성인 남성이 처제의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있다는 걸 듣게 된 순간부터 처제에게 성욕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걸 대체 어떤 보기 좋은 포장지로 포장할 수 있을까.
사실 마음 한켠에선 영혜가 정신적으로 온전치 못한 상태가 아니길 빌었다. 만약 그게 맞다면, 형부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고 응한 그녀의 선택이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조차 없는 상태에서 진정 자의적으로 한 선택이 아닌 게 맞다면, 결과적으로 그녀는 형부에게 강간 당하고 성 착취 영상물을 촬영당한 것이기 되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녀가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태여서, 자의로 형부와의 불륜을 택한 쪽이 그녀의 인생에 덜한 비극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그건 그저 나의 바람일 뿐이었고 형부라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온전치 못해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상태인 처제에게 자신의 성적 욕구를 푸는 사람이 맞았던 것이다.(이 해석은 개인적인 추측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영혜는 왜 거절하지 않았을까.(못한 것이라 표현해야 맞는 걸까.) 아마도 영혜는 일평생 자신이 겪어왔던 무관심이라는 폭력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처음으로 자신의 욕구가 투영되었지만 결코 옳은 선택이 되지는 못한 선택을 한 것이 아니었을까. 식물이 되고 싶다는 욕망. 형부가 자신의 몸에 꽃을 그려줌으로써 자신의 욕망에 더 가까워질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영혜는 어쩌면 유일하게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켜주는 형부가 반가웠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과정에서 형부와의 성관계가 포함되리라곤 생각도 못 했겠지만. 결국 형부는 넘어서는 안될 선까지 넘었고, 결과적으로 영혜는 또 다른 폭력을 당하게 되었다.
3. 나무 불꽃
이 시점부터는 영혜의 언니인 ‘인혜’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개인적으로 인혜의 시점이 나오는 순간부터 숨통이 트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앞부분에서 영혜의 남편과 그녀의 형부의 시점에서 전개될 때는 그들이 단 한순간도 영혜가 왜 그러는지 이해해 보려고 하지 않고 궁금해하지도 않았다는 점이 너무 답답하고 숨 막혔다. 그들이 영혜를 사람으로서 존중했다면, 자신들만의 기준과 잣대로 영혜를 함부로 단정 짓지 않았다면 그녀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궁금해하는 것이 당연한 거였다. 그러지 않은 것이 영혜에겐 너무나 큰 폭력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인혜는 영혜에게 폭력적이지 않은 인물이었나? 그렇다고 할 수도 없다. 인혜는 영혜가 아직 ‘정신이 온전치 않은 애’라며 영혜를 단정 짓고 정신 병동에 가둬버린다. 영혜에게서 자유의지를 빼앗은 인혜야말로 어쩌면 가장 큰 폭력을 휘두른 것일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인 입장에선 인혜의 행동이 이해가 가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서로에게 폭력을 가하는 존재하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의도하지 않았어도 나의 어떠한 생각이나 행동이 타인에겐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할 것 같다.) 그럼에도 인혜가 이 소설 속 인물들 중 가장 이해가 되는 이유는 적어도 영혜의 입장과 생각을 궁금해했다는 것이다. 영혜의 남편은 이를 시도조차 하지 않고 그녀를 버렸으며, 그녀의 부모와 남동생 또한 마찬가지다. 끝까지 영혜에게 폭력만을 휘두르다가 그녀를 버렸다. 형부는 그녀의 정신 상태를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자신의 성적 도구로 이용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인물들 속에서 유일하게 인혜만은 영혜가 왜 그러는지 이해하진 못해도, 적어도 궁금해했다. 과거의 여러 시점을 회상하며 만약 그때 영혜를 이해하고 받아들였다면 이런 비극이 벌어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라며 후회를 하기도 한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인혜의 그런 행동 또한 영혜에겐 폭력이었겠지만.
하지만 그렇다면 인혜에겐 어떤 다른 선택지가 있었을까. 자신의 남편과 섹스를 하고, 그걸 비디오로 찍고 심지어는 식물이 되겠다며 음식도 거부하고 죽어가는 동생을 병원에 보내지 않았으면 대체 어떤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여기서 앞서 언급했던 인간의 폭력성을 다시 가져오자면, 영혜 또한 폭력을 당하기만 한 피해자가 아닌 적어도 인혜에게만큼은 폭력의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인혜가 자신의 입장에서 영혜를 ‘아직 정신이 온전치 않은 애’라고 생각하지 않고 영혜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야 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인혜에겐 너무나 큰 폭력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인혜의 입장에선 영혜를 그렇게 봐야만 했던 것이다. 자신의 동생을 혐오하지 않으려면, 자신의 남편과 같은 취급을 하지 않으려면 차라리 영혜를 아픈 사람이라 여기고 병원에 보내버리는 폭력을 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폭력의 정당화라기보단.. 개인적인 주관에서 인혜의 선택을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영혜는 모든 폭력에서부터 벗어나 인간이 아닌 식물이 되기를 꿈꿨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인간은 식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또한 인혜가 정신이 온전했든 온전치 않았든, 자기 언니의 남편과 관계를 가진 순간부터 스스로 폭력적이지 않은 존재가 되기로 했던 다짐도 실패로 돌아갔다. 영혜는 정말 어떤 마음이었을까. 끝까지 영혜의 시점을 보여주지 않고 이야기가 끝났기에 결국 영혜의 입장은 끝내 알 수 없게 되었지만, 만약 영혜의 생각을 알았어도 그녀를 완전히 다 이해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가 없다.
가장 서글픈 부분은 결국 피해자들끼리 남아서 서로 고통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자꾸만 이 비극의 모든 원흉들이 애초에 없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처음부터 인혜와 영혜가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억압받고 자라지 않았다면, 아이들의 선택을 존중하고 아이들을 다정히 대하는 정상적인 부모 밑에서 자랐다면 어땠을까. 영혜는 폭력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고, 폭력에 익숙해질 일도 없지 않았을까. 결혼을 필수라고 여기는 사회 분위기가 아니었다면, 인혜와 영혜 모두 그런 남편과 결혼할 일도 없지 않았을까. 또한 결혼을 했더라도 그들의 남편들이 정상적인 사람이었다면, 영혜는 자신을 동등한 위치의 배우자로서 인정해 주고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을 만났다면, 인혜는 자신만을 이기적으로 우선시하지 않고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있으며 이상성욕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남편을 만났다면 그런 비극이 벌어질 일도 없지 않았을까. 결국 남은 피해자들끼리 서로 폭력을 가하고 상처받는 일이 없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애초에 이 모든 폭력들에 노출되지 않았다면 인혜와 영혜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면서 어쩌면 행복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한번 인지하고 나니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이미 우리 사회에는 우리가 너무 익숙해져 버려서 폭력인지도 모르는 폭력들이 만연해 있다는 사실을. 그러한 사회를 바탕으로 우리는 서로에게 끊임없이 폭력을 당하고, 또 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4. 이 소설을 통해 생각하게 된 것
• 인간은 폭력의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다. 여기서 말하는 폭력이란 물리적인 폭력만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타인의 자유의지를 빼앗고 개인의 생각을 존중하지 않으며 타인에게 강압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모든 말, 행동, 태도, 관습, 편견, 사회 분위기 등을 일컫는 말이다. 폭력이 되는 기준 또한 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에 의도하지 않았어도 나의 생각과 행동 등이 타인에겐 폭력이 될 수 있다.
• 주관적인 잣대로 남을 함부로 판단하고 단정 짓는 것이 가장 큰 폭력이 될 수 있기에 우리는 안일한 타자화를 경계해야 한다. 그것이 설령 우리 사회에서 주류 의견이라 여겨지는 것이라 할지라도, 다수의 의견이 곧 전체의 의견이 될 수는 없기에 누군가에겐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 자신이 폭력의 피해자라고 해도 타인에겐 또 다른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해선 안 된다.
• 타인의 주관을 서로 다름으로 존중해야 되는 범위와 잘못된 걸 틀렸다고 말해야 하는 범위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 걸까. 현재까지는 개인의 어떠한 생각이나 행동이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즉 폭력적이지 않은 범위 내라면 그저 다른 것뿐이니 존중해야 하는 것이고 그 선을 넘어가면 그때부턴 틀린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이 기준 안에서도 주관적인 감정이 너무나 많이 개입해서 아직 뭐가 맞고 틀린 건지 잘 모르겠다. 아마도 나는 영원히 이에 대해 고민하고 고찰하겠지. 끝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