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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 ・ 2025.03.24

2025.03.23 (Sun)
내 외로움의 책임을 빠짐없이 묻고 싶어졌다
나는 가끔 내가 실망으로만 이루어진 사람 같아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p15)
"단어가 모여서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되고, 대화가 되고. 근데 이걸 따라가다 보면 생각보다 아주 잘게 나뉘어요. 가끔 음성언어들이 숨이라는 입자로 이루어진 어떤 유기체 같아, 나는." (p31)
"앞으로 뭘 하고 싶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미래를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나를 둘러싼 사물, 분위기, 정보와 지식, 사람들, 대화, 내 안의 생각과 감정이 뚜렷하게 느껴지는 날이 많지 않았다. 온 세상에 윤곽선이 하나도 없고, 그저 덩어리로 보였다. 그래, 사람들에겐 생각이 있는데 내겐 항상 기분만 있는 것 같았다. (p36)
시대의 어른들, 영웅들이 하고 싶은 걸 하세요, 좋아하는 걸 하세요, 하며 꿈을 강조할 때마다 재수가 없었다. 모든 사람이 그런 걸 품고 살진 않는다는 걸 잘사는 사람, 잘되는 사람, 잘나가는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p37)
문득, 사람들이 물 한 잔을 마시는 데도 돈이 드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아득해졌다. 다들 처음부터 돈이 있고, 경제의 원리를 알고,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혼란스럽지는 않은지, 좋아하는 게 있는지, 누가 물어보면 바로 말할 수 있는 인생 계획이 있는지도 궁금했다. 나는 아무리 떠올려보아도 나를 알 수 없었다. (p43)
가끔은 내가 사실 연속적인 실망과 불안으로 빚은 인간 모양의 케이크라서, 아무 때나 조금만 건드리면 녹아버리고 으깨지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p44)
아마도 내가 바란 것은 함께하자, 그런 사소한 환대였던 모양이다. 그것을 너무 바란 나머지, 또 너무 부정한 나머지 왈칵 울 수밖에 없었다. (p46)
"바람이 왜 좋은데?"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내가 이 세상에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p90)
마음에 방이 여러 개가 있고, 이네스가 그 모든 방에서 한꺼번에 체크아웃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직 떠나지 않은 이네스에게 내 외로움의 책임을 빠짐없이 묻고 싶어졌다. 상상만으로 버틸 수 없고 오히려 무너지는 것도 있다는 걸 깨달았고, 나는 텅 빈 선로를 바라보며 이네스가 떠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p96)
정신은 가만히 걸으면 서서히 윤곽이 드러나는 것 같았다. 종이 아래 동전을 두고 연필로 그 위에 계속 선을 그으면 동전의 모양이 본떠지는 것처럼, 뭔가가 보이지 않을 때 어딘가를 내리 걷고, 밟으면 그게 뭔지 알게 되는 순간이 온다. 쳇바퀴 같은 학교 밖과 안을, 도시를 하염없이 걸어 다닌날들도, 정원에서 일부러 나뭇잎을 밟았던 날도, 이네스와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조차 전부 마음의 모양을 알아내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마음은 입술의 모양, 혀의 모양, 숨과 바람의 모양이 되었다가 제멋대로 커져서 터져 나가고 있었다. (p98)
봄은 프리마베라, 겨울은 잉베르누, 지혜는 사베도리아, 슬픔은 트리스테자, 사랑은 아모르. 이네스는 내가 단어를 읽으면 바로 그 단어를 활용해 문장을 만들어주었다. 봄은 따뜻하다, 겨울은 춥다, 지혜는 길이 남고 슬픔은 잠깐이다, 사랑은 입술과 언어로 뭐 이런 문장들. 입속에서 부는 바람 같은 말들. (p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