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공개 ・ 2025.06.13

2025.05.26 (Mon) ~ 28 (Wed)
우연이 세 번이면 운명일까, 집념일까? 잘 생각해봐.
지속적인 상실과 마모를 전제로 하는 생에 과거를 10년 잘라내든 45년 치 걷어내든 무슨 상관이 있겠으며 그런다고 삶이 끊임없이 지워져 백묵의 흔적만 남은 칠판과 같다는 본질은 달라지지 않으니 이제라도 얼굴에 철판을 깔다 천수까지는 안 바라고 비명횡사든 객사든 간에 적절한 시기에 세상을 떠나면 그만이라는 생각도 가끔 들었지만, 막상 그런 호기로운 자세로 손 실장 앞에 나섰다가도 조각은 어쩐지 입이 떨어지지 않아 번번이 돌아서곤 했다.
p35
굳이 먹어보지 않아도 입안에 도는 감미, 아리도록 달콤하며 질척거리는 넥타의 냄새야말로 심장에 가둔 비밀의 본질이다. 우듬지 끝자락에 잘 띄지 않으나 어느새 새로 돋아난 속잎 같은 마음이.
p102
그랬는데 이제 와서 타인의 눈 속에 둥지를 튼 공허를 발견하고 생겨나는 이 연민이라니, 살과 뼈에 대한 새삼스러운 이해라니. 노화와 쇠잔의 표지가 아니고서야 이런 일관성 없음이라니.
p177
“내가 먼저 죽으면 그다음에 너 사장.” “그렇게 되면.” 당신을 따라갈까요. “바지사장 따로 갖다 앉힐게요. 머리 체질은 못 되거든요.”
p236
그녀는 햇수로 거의 10년 만에 총을 잡아보았고 움직임이 예전과 같지 않았다. 이미 숨이 턱에 닿았고 온몸은 자갈이 쓸고 지나간 것처럼 저릿저릿하다. 피가 흐르는 왼쪽 팔은 찬바람에 감각을 진작 잃었고 그녀는 류가 그립다.
p297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그래서 아직은 류, 당신에게 갈 시간이 오지 않은 모양 이야.
p332 - 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