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공개 ・ 2025.11.14 ・ 스포일러 포함

2025.11.13 (Thu)
맥락 학회 비평문 때문에 봤는데, 정말 좋은 영화였다. 원래도 볼 생각은 있었으나 영화관에서 본 나 자신을 칭찬하고 싶음. 성폭행 피해자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나에 대해 다룬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스포 엄청 많으니까 보기 전에는 절대 읽지 말기! 사과 메타포도 정말 좋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왜 주인이는 사과를 저렇게까지 싫어하지?’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영화의 마지막에 사과(apple)과 사과(apologize)가 동음이의어라는 생각을 했다. 알아차리고 나서 머리가 띵했는데.. 왜 지금까지 몰랐던거지? 할 정도로 굉장히 직관적인 메타포.. 우리가 무작정 건네는 사과가 용서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얼마나 폭력적인지 사고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용서를 미덕이라고 여기며 이를 종용하는 사회의 분위기가 얼마나 부도덕한지도.. 선의와 그에 따른 결과도 마찬가지이다. 수호가 선의를 품고 있는 캐릭터라는건 명확하지만 그 선의가 향하는 대상의 집단에 속한 주인은 오히려 수호와 충돌하게 된다. 왜? 수호가 지닌 선의는 역설적이게도 배려의 모순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수호는 성폭행 피해자들과 연대하고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고자 하지만, 그런 수호가 지닌 선의는 굉장히 모순적이게도 주인에게 달갑지 않게 다가온다.. 그 이유는 ‘성폭행 피해자들은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가지고 살아갑니다.’라는 문구 때문.. → 이 정도는 보는 관객들도 어디가 문제인지 충분히 알아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도의 재판에서 변호사가 미도의 행실을 지적하며 ‘피해자답지 못하다’ 라고 말하는 장면이 얼마나 사회적, 윤리적으로 옳지 않은지 우리는 매우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의를 지닌 사람들이 무심코 건네는 말 한마디에 얼마나 날카로운 고정관념이 파고들어 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사회가 피해자들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되는 포인트 같았다.. 진정한 연대라면 어떠한 가치판단을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있는 그대로, 한 사람의 주체로 존중하는 태도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세차장 시퀀스는 참 좋았다. 보는 순간 아 여기는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이 되겠구나 싶었음. 주인의 페르소나적 압박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었는데, 지금까지 괜찮은 척 아무런 문제도 없는 듯이 잘만 지내던 주인이가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아주 노골적으로 바닥까지 드러낸 장면이었다. 세차의 과정에 맞춰 주인이의 감정을 연결지어 연출한 것도 굉장히 인상깊었다. - 세차가 시작되며 차 창문에 물이 흐름 - 주인이의 감정 동요 시작, 눈물 흘리기 시작함 - 세차 솔이 차 창문을 완전히 덮어버려 암흑이 찾아옴 - 주인이의 감정이 바닥까지 내려감, 완전히 절망 - 세차가 끝나고 건조 과정 - 태선이 물과 손수건을 주며 “한바퀴 더 돌까?” 그리고 세차가 끝나는 장면에서 차 앞유리에 ‘브레이크 밟지 마세요’ 간판이 크게 잡히는 모습은 아마 주인이에게 멈추지 말라고 격려하는 감독의 메시지 같기도 하고? 관장님이야말로 감독님이 생각하는 좋은 어른의 표본인듯. 실제로 인터뷰에서도 그렇게 말하셨던데, 한 발 떨어진 곳에서 미도와 주인을 바라보며 그들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포용하려는 그 태도가 아마 좋은 어른의 모습이겠지… 관장님 캐릭터를 제작하실 때 관장님이 미도와 주인이에게 벌어진 일은 거의 모르게끔 제작하셨다던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정에서 유리된 미도가 태운 벽의 그을음을 페인트칠 하지 않고 놔두는 것은 관장님만의 존중 방식이 아닐까.. 지나친 공감이나 동정도 때로는 폭력이 될 수 있다는게 당연하면서도 참 어렵다. 비평문 쓰면서 세가지 측면으로 이 영화를 분석해봤다. <세계의 주인> → 사회가 지녀야 할 생각이자 지향점 세계 속의 개인으로 살아가는 ‘주인’에 대한 입장. 개체로서의 주인은 스스로를 둘러싼 세계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하곤 한다. 주인에게는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어떤 것들이 다가오기도 하는데.. 수호의 서명 용지에 적힌 어떤 한마디, 몸을 더듬는 남자친구 찬우의 손, 선의의 사과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 것을 강요하는 친구 등이 그 예시가 되겠지? 어쩌면 이 세계는 주인에게 어떠한 특정한 모습을 강요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진실을 내놓은 주인에게 사회는 참을 수 없는 잣대와 평가를 덧씌우는게 아닐까? <주인의 세계> → 마법은 없지만, 그럼에도 살아갈 수많은 ‘주인’의 삶 해인이가 부린 ‘모든 근심걱정을 사라지게 만드는 마법’은 없지만 주인은 계속해서 나아간다. 주인의 삶에서 타인이 주인을 평가하는 방식은 바뀌지 않는다. 영화의 끝까지 반 친구들이 주인에게 사과를 했다던가 하는 묘사는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설령 사과를 한다 하더라도 이것이 과연 진정한 사과로 받아들여질지.. 사과를 싫어하는 주인에게 이를 용서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일어서서 나아가는 모습이 이 영화의 엔딩이라고 할 수 있을 듯. 찬우의 성애적 사랑에 위로를 받는 방식이 아니라, 유라가, 미도가, 태선과 해인이, 그리고 출가한 아빠가 보낸 메세지에서 느껴지는 사랑의 방식으로 주인은 스스로 일어서서 나아가겠지? 우리는 이러한 주인의 세계에 대해서 잘못됐다던가, 혹은 잘 됐다던가 가치판단할 자격을 지니고 있지 않음. <사랑의 세계> → 영제로는 the world of love로 번역이 되었다던데, 왜 굳이 사랑을 넣으신 것인지 생각을 해보면… 앞서 조금 말했듯이 사랑으로 삶을 살아가고 사랑으로 삶을 채워가는 주인을 강조하고 싶었던게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사랑을 성애로 속단하지 말자는 뜻.. (ex. 찬우와의 결별) 누리를 꼬집는 주인도 한번쯤 생각해볼만하다고 본다. 처음에는 왜 꼬집는거지? 헉.. 하고 당황했었는데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 누리에게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주기 위해 어떤 소신과 모종의 결심이 담긴 과격한 오지랖을 부린 것으로 해석해볼 수 있을듯. (발췌) 인물들이 명확한 하나의 선의나 악의를 지니고 있는게 아니라는 점이 참 다면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해인이가 너무 슬펐음..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을 없애는 마술’을 보여주고 싶어서 가족들한테 꼭 오라고 신신당부했는데 각자의 사정들로 인해 오지도 못하고.. 심지어 학예회 마술쇼에서는 마술도 실패해버리니까 그 뿐만 아니라 해인이가 쓰다 만 편지가 정말 눈물포인트였는데, “삼촌, 저 해인이에요. 우리 누나한테 편지 보내지 마세요. 저는 그냥 삼촌이 사라져버렸으면 좋겠어요”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고 표현한 것도 해인의 마술과 연관지어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