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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공개 ・ 06.18

2024.05.11 (Sat)
그래 우리들의 모국어는 침묵인것을
어떤 사건들의 백 년 단위 기념일은 사람으로 사는 동안 단지 요행으로만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아마도 그 기회는 한 번뿐이다. 운이 좋다면 나는 당신의 백 주년을 살아 한 번만 축하할 수 있다. 우리가 서로를 제때에 지나간다면. (물론 그러기 위해, 그에 앞서 우리는 이미 서로를 제때에 놓쳤어야 한다. 동시대를 살지 않았어야 하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내가 당신을 영원히 미화할 수 있어야 한다.)
동시대인이라는 말의 가장 적합한 정의란 ‘함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다. 우리는 시대를 견디며, 시대를 견디지 못한 이들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 그리하여 어떤 죽음들에 대한 기억을 설명 없이 나누는 사람들. 함께 웃는 사람들이기보다, 함께 웃지 못하는 사람들. 무언가가 좀처럼 웃기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한 장르를 한 사람에게 빚질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사는 동안 사람에게 빚지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을까. 누군가 처음 맛보게 해준 과일을 철마다 찾아 먹고, 누군가 들려준 문장을 슬픔의 어귀마다 만져보는 일. 나를 이루는 것들은 모두, 한 시절 매우 고유한 방식으로 내 삶에 도래했다가 대개는 흔한 방식으로 멀어진, 구체적으로 아름다웠던 한 사람 한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들이 준 것이 하나의 장르 전체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과일이나 시 자체일 수도.
모든 것을 알아도 문장을 말하는 이유는 그 말의 발설 자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알아도 생을 사는 이유는 살아야지만 삶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살아야지만 당신을 보기 때문이다. 당신의 말을 당신의 입으로부터 듣고 싶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이 삶을 바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수행이 일어나기 전과 후의 두 세계는 완전히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