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공개 ・ 04.10

2026.04.09 (Thu)
고갱의 그림, 하면 떠오르는 건 단연 타히티의 풍경이다.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타히티의 여인들을 보며 나도 그곳에 가고 싶었다. 사실 고갱을 알게 된 것은 그의 그림이 아니라 고흐 때문이었다. 절친한 친구였던 둘은 고흐의 우울이 심해지자 파국을 맞는다. 피로 물든 붕대를 귀에 감은 고흐를 뒤로 하고 도망치듯이 떠난 고갱을 상상하며 나는 둘이 아니 정확히는 고갱이 고흐를 사랑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그에게 관심이 갔다. 그의 그림을 찾아보게 되었다. 뚜렷한 색채가 아름다웠으나 그보다는 그림에서 느껴지는 타히티에 대한 애정이 인상적이었다. 그때부터 나도 타히티가 궁금했다.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는 자유로운 사람들 틈에서 후덥지근한 공기를 마시며 그림을 그리는 고갱이 나였다면, 내가 스트릭랜드였다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어릴 때는 이걸 읽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스트릭랜드를 가여워했는지, 아니면 경멸했는지? 스트릭랜드를 부러워하는 지금의 나와 달리 어린 나는 스트릭랜드에 대해 어떤 가치 판단을 내렸을까? 그땐 내가 달을 좇을 줄만 알고 6펜스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바닥에 떨어진 6펜스를 주워 달 그림을 사는 데 쓰는 그런 어른이 될 줄은 모르고. 그래서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심술궂고 괴팍한 찰스 스트릭랜드를 동경했다. 그의 성격도 결단도 예술성도 내가 죽어도 갖지 못할 것이어서. 나는 끽해야 그가 경멸하는 인간 중 하나가 될 수나 있을까. 그림을 그리기 위해 지금까지 누려왔던 모든 것을 뒤로 한 사람의 인생은 굴곡질 수밖에 없었다. 책을 정신없이 보게 된 데는 자극적인 이야기의 영향도 있겠으나 나는 그의 못된 성질에도 자꾸만 모여드는 그의 주변 사람들이 궁금했다. 기어코 아내까지 빼앗긴 더크 스트로브를 비롯하여 말년에 그가 나병에 걸렸어도 죽을 때까지 떠나지 않았던 아타와 아닌 척 늘 그의 근처에 있던 주인공. 그들은 스트릭랜드의 어떤 점에 끌렸던 것일까. 남들에겐 관심도 없고 혼자 있기만을 원한 스트릭랜드에게 애정을 붓는 사람들이 끊임없던 이유는 글쎄, 그들도 스트릭랜드가 가진 곧은 심지를 동경한 게 아닐까? 미술에 대한 열정을, 집념을, 그 외에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맹목적인 마음을... 내게 있어 달은 예술이 아닌 세상이었다. 그런 점에서 내가 달이라고 생각한 건 사실 6펜스 동전이었을 지도 모른다. 세상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이상적이라기 보다는 세속적이니까. 외로운 사람들, 삶이 버거운 사람들을 돕고 싶었고 그것이 진정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믿었다.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일. 그게 내 달이었고 내 꿈이었다. 그러나 대학에 입학한 이후로 자꾸만 내 시선은 아래로 아래로, 하늘이 아닌 땅을 향했다. 나에겐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면서도 단단함을 유지할 마음과 정신이 없었다. 코로나를 핑계로 대학원과 여러 기업 사이에서 방황하던 나는 결국 바닥에 쭈그려 앉아 떨어진 동전이 있나 없나 들여다만 보길 선택했다. 그래 이게 내 선택이 아니라고 할 순 없다. 그렇지만 자꾸 슬퍼졌고 스스로가 싫어졌다. 동전을 쥔 내 마음 속에는 언제나 달이 떠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는 나도 스트릭랜드 같은 용기를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게 내 꿈을 쫓아가는 일이든, 먼 나라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사는 일이든. 그것 또한 내 달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