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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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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톨스토이 문학전집 2)(반양장)
책
톨스토이가 이 작품으로 부활시킨 것은 네흘류도프와 카츄샤만이 아니었다. 그 시절 러시아와는 동떨어진,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나와 같은 사람도 이 책을 읽음으로써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일주일이 안 되는 시간 동안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네흘류도프와 카츄샤에 대한 나의 마음이, ‘범죄자’라고 불리는 이들과 모두가 우러러보는 명예와 권력을 가진 이들에 대한 나의 시선이 서서히 바뀌는 것을 느꼈다. 그중 가장 놀라웠던 것은 나의 분노와 증오도 사랑과 용서로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의 탄생이었다. 처음 나의 분노는 네흘류도프를 비롯한 남자들을 향했다. 카츄샤로 하여금 어려운 길을 걷게 만든 것은 네흘류도프와 다른 남자들이었다. 특히나 네흘류도프가 진심으로 그의 마음을, 몸을 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카츄샤는 타락(여전히 이 단어가 맞는진 모르겠지만)의 길을 걸었다. 그래서 괘씸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징역형을 기다리고 있는 카츄샤를 보고 나서야 자기 잘못을 깨닫다니. 그것도 자신은 떵떵거리며 배심원석에 앉아서. 당연히 카츄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카츄샤와 결혼하겠다는 다짐도 자의식과잉처럼 느껴졌다. 카츄샤의 지난날에 대한 보상으로 자신과의 결혼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으로 지난 세월과 그간 그가 받은 고통에 대한 보상이 완벽히 이루어지나? 그리고 카츄샤가 그걸 진정으로 원하는지 아닌지 어떻게 확신을 하나? 한참이나 고까운 눈으로 네흘류도프를 바라보았다. 변호사를 선임하고 이리저리 청원서를 쓰는 것이 카츄샤를 위한 척 시혜적으로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한 일로만 보였다. 그러나 네흘류도프는 카츄샤를 위해, 그리고 카츄샤와 함께 수감된 다른 이들을 위해 판사와 변호사 등 고위 관료들을 만나며 실제로 정말로 생각의 변화를 겪었다. 어느 순간 네흘류도프가 진심으로 변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사유재산, 특히나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그의 믿음으로부터 나온 행동-실제로 경작하는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는 것-을 보며 느꼈다. 물론 오랜 기간 사치스럽고 여유로운 생활을 해온 네흘류도프는 자신의 것이라 여기던 많은 것을 포기하는 게 정말 맞는 일인지 고민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면모가 오히려 네흘류도프가 ‘사람다운’ 사람임을 보여주는 지표처럼 여겨졌다. 카츄샤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맑은 그의 마음이 그의 깊은 곳에 살아 있으며, 다만 방탕하고 이기적인 생활 밑에 숨겨져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네흘류도프는 카츄샤를 위해 감옥의 안과 밖을 같은 시간 속에서 경험하며 사회의 부조리함을 깨닫는다. 그러한 깨달음이 가장 잘 드러난 부분은 배심원으로서의 둘째 날, 매트를 훔칠 수밖에 없던, 자신의 죄를 시인한 청년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였다. 230쪽에서 네흘류도프는 생각한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저 청년이 특별히 악한 사람이 아니라 가장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은 지극히 분명하다. 그리고 청년이 저런 사람이 된 것은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그런 사회적 환경에 놓였기 때문이다. 이런 청년이 사회에 생기지 않게 하려면 사람이 불행하게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사회적 환경을 먼저 없애는 것이 당연한 순리다. / 그런데 우리는 무얼 하고 있는가? 저런 청년과 같은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체포되지 않고 있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우연히 우리 손아귀에 들어온 저 청년만을 감옥에 처넣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게 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지극히 위험하고 의미 없는 일을 해야만 하는 환경으로 내몬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이와 같은 사회 구조의 병폐가 100년도 더 지난 한국에도 적용된다는 것에 통탄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렀음에도 다른 나라, 다른 사회에서 동일한 부조리가 발견된다면 이건 인간의 본성인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니 인간이 너무너무 미웠다. 증오스럽고 역겹기 짝이 없었다. 약하고 위기에 처한 사람들의 사정은 생각하지도 않고 무작정 손가락질하고 처벌하는 가장 보통의 사람들이 너무 끔찍했다. 231쪽에서 네흘류도프는 다시 생각한다. ‘만약 이런 사람들에게 주는 월급 중 단 100분의 1만이라도 사회에서 버림받은 존재들을 도와주는 데 돌리면 어떨까? 우리는 우리의 안전과 생활의 편리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노동과 용역을 제공하는 사람들로만 여기고 있는 이들을 도와주자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청년을….’ 작중 추후 카츄샤가 함께 지내게 된 정치범들 중 누군가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노동의 가치가 인정받아야 한다는 의견이 지지를 받는, 공평하고 평등한 세상을 위해 부유한 이가 그렇지 않은 이에게 나누는 것에 대한 언급이 금기시되지 않는 사회가 이 책의 배경이었던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오히려 10여 년 전보다도 이와 같은 생각이 억압받고 있는 걸 생각하면 참으로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 2025년에 ‘빨갱이’라는 단어가, 그것도 누군가를 조롱하고 낙인찍기 위해 사용되고 있을 수가 있지? 힘들게 삶을 영위하고 있는 타인을 위해 내가 가진 것을 나누자는 의견이 무슨 문제가 되지? ‘자유’라는 말에 지나치게 사로잡힌 이들이 자신의 자유를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 양 굴 때마다 지친다. 네흘류도프가 관리들, 판사와 검사, 변호사와 감옥 소장, 간수, 호송병들에게 느낀 역겨움을 나도 매일같이 느끼고 있었다. 다만 나는 권력보다도 인터넷에서 손가락을 놀리며 ‘자유로운’ 의견을 배설할 권리를 가진 이들 전반에 대한, 좀 더 폭넓은 혐오감에 심각하게 지친 상태였다. 네흘류도프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된 것은 이쯤부터였다. 257쪽의 서술은 꽤나 파격적이라 놀랐다. 글의 말미에 네흘류도프가 마태복음을 읽으며 그리스도를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고려했을 때 더욱 그랬다. 사실 이건 내가 종교 전반에, 특히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무지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감옥에서 죄수들을 모아 미사에 참석하게끔 하는 장면을 그리며 톨스토이는 말한다. ‘이 미사에 참석한 그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곳에서 이루어진 모든 일들이 사실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성 모독이며 조소를 퍼붓는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사제가 들고 들어와 사람들에게 입맞춤을 시킨, 끝에 칠보 구슬을 매달아 장식한 황금 도금의 십자가는 예수가 이곳에서 그의 이름으로 행해진 이 모든 일을 금지했다는 이유로 매달려 처형당한 처형대의 모양을 본뜬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굉장히 공감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당시 이런 서술이 이단적이라고 여겨지진 않았나 궁금했다. 러시아 정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적지만 당시 러시아의 많은 미사가 이처럼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을 때, 이는 미사를 진행하는 사제들 나아가 그들이 대변하는 종교, 러시아 정교의 전반적인 형식에 대한 도전이 아니었을까? 여기까지 쓰고 작가 연보를 보는데 아니나 다를까 1899년 장편 소설 <부활>을 발표하고 1901년 2월에 러시아 정교로부터 파문당했다고 적혀 있다. 아마 이 소설 덕분이었을 것 같다. 800여 쪽에 달하는 작가정신 출판의 <부활>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책의 3/4를 조금 넘긴 뒤에 나온다. 작열하는 7월, 이송을 위해 죄수들은 뙤약볕에서 몇 시간이고 걸어야 했다. 그 결과 가장 약한 이들 5명이 일사병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유형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감옥에서 나온지 하루도 되지 않아 비참하게 죽어버린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보고도 호송 장교, 간수장, 경찰, 경찰서장, 그리고 죄수들과 아주 먼 곳에서 이를 지시한 주지사까지 많은 이들이 아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그 무엇도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에 개탄하며 네흘류도프는 635쪽에서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비록 한 시간만이라도 그리고 아주 예외적인 어떤 한 경우에 국한된다고 할지라도 인간을 사랑하는 감정이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그러면 범죄가 없을 텐데.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죄를 짓고도 자기는 죄가 없다고 여기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을 텐데.’ 이미 여기서 네흘류도프는 부활을 예고하고 있었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사랑! 다른 이를 가엾게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하다면 범죄에 대한 선고도, 범죄도 없을 것이다. 심판받을 이도 심판할 이와 동등한 인간임을 안다면, 그러므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심판할 권리가 없음을 깨닫는다면! 어째서 누군가는 남들보다 돈이, 땅이 많다는 이유로 그들 위에 군림하는가? 돈과 땅이 있으면 권력이, 또 권력이 있으면 돈과 땅이 생긴다는 걸 아는 사람들은 욕심내는 것을 멈추지 못하고 더욱 긁어모으려고 한다. 그럴수록 가진 이는 더 갖게 되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더 가난해진다. 그리고 가진 이의 그렇지 못한 이에 대한 착취도 점점 더 당연한 것이 된다. 이게 다 욕심 때문이다. 그렇다면 욕심을 내지 못하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소유할 수 없게, 토지라든가 하는 것을 소유할 수 없게 한다면… 그 무엇을 한계 짓지도 그 무엇으로부터 한정 받지도 않는 그 노인처럼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쓰고 보니 아직 나는 분노 대신 사랑을, 증오 대신 용서를 실천할 준비가 안 된 것도 같다. 깨달음과 행동하는 것은 역시 많이 다르구나. 반성 또 반성. 비록 네흘류도프는 카츄샤와의 결혼이라는 맨 처음의 목표를 이루진 못했다. 카츄샤 역시 네흘류도프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음에도 그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시몬손을 택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라는 타인을 위한 변화가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변화를 겪었다. 그리고 부활했다.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네흘류도프는 카츄샤와 결혼하지 못했으나 좌절하지 않았다. 대신 카츄샤와의 재회, 그리고 그 이후로 겪고 깨달은 모든 것으로부터 더 많은 사람을, 가장 인간다운 인간들을 위하고 사랑할 미래를 향해 나아가며 이야기가 끝이 난다. 책은 여기서 끝났지만 네흘류도프의 삶은 이제 다시 시작이라는 것을 안다. 카츄샤도 그렇다. 그리고 나도, 이 책을 통해 부활을 겪은 나 역시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준비가 된 것 같다. 사랑으로 가득한 새로운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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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토피아 2
영화 / TV
내가 이걸 보려고 20대를 살아냈구나…. 10년을 기다린 게 아깝지 않을 정도로 너무너무 좋았다. 주디 홉스와 니콜라스 와일드가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상대임을 닉도 알고 주디도 알고 우리 관객들도 알게 해준 2편 정말 감동 그 자체였다. 사랑이 뭘까? 고개를 들어 닉주디를 보게 하라…. 1편에서는 사랑일 듯 우정일 듯 긴가민가한 닉과 주디의 관계가 차곡차곡 쌓여갔다면 이번 2편에서는 둘의 관계가 단순 우정은 아님을 보여주는 데 큰 의의가 있었다. 허니문 산장으로 올라가는 길부터 본격적으로 둘의 관계가 우정 이상임이 드러나는데, 주디가 선물로 준 볼펜을 실수로 떨어뜨려 박살이 나자 둘의 관계에도 균열이 생겼다. 주디는 속상해서 아무 말도 안 하고 계속 암벽을 타고 올라가기만 했고 닉도 그랬다. 그런데 그런 닉의 침묵이 단순히 미안함에서 오는 게 아닌 게 보여서 나는 너무 심란했다…. 그런데 산장에서 서로 마음 터놓고 이야기도 못 하고 헤어지게 되어서 정말 머리를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전개상 엔딩에서는 둘 다 살아서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파트너라고 얘기하겠지! 그렇지만 둘은 그걸 몰랐을 거고 주디는 닉이 잡혀갔을 줄만 알았을 거고 닉은 주디의 생사도 모르고 걱정했을 거고… 정신병이 온다는 너무 수동적이다. 내가 정신병에게로 간다(당사자성 발언). 그렇게 아무 말도 못 하고 산장에서 헤어진 이후 한참이 지나서야 둘은 솔직한 마음을 말할 수 있었다. 닉이 해독펜을 던져 주디를 살리고 주디가 떨어지는 닉의 손을 잡아서 살린 이후에. 서로 생사도 확인하지 못하고 떨어져 있는 동안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 모든 일이 다 끝나고 닉도 주디도 횡설수설하면서 그제야 진짜 자기 마음을, 네가 내겐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고백하는데 어떻게 눈물이 안 나냐고…. 닉주디 관계성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이면 엉 하고 울어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상영관에서 나만 울었다고 하지? 진짜 아 도저히 안 되겠다 둘이 빨리 결혼해라 애초에 둘이 서로 상처 주고 상처받은 이유가 너무 다른 둘이 서로를 너무 아끼고 사랑해서라는 게… 벅차기도 하고 이해가 가기도 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해내고야 마는 정의로운 주디와 되도록 쉽게 살고 싶은 닉이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갈등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1편 볼 때는 주디의 시선으로 닉을 봤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자꾸만 닉의 시선에서 주디를 보게 되었다. 어른이 된 걸까? 나이가 들면서 점점 주디보다는 닉에 가까워지는 내가 아쉬웠다. 그렇지만 닉이 주디를 보는 것처럼 나도 조금 어렸던 나를 되돌아볼 순 있었다. 다만 닉은 주디가 행여나 다칠까 걱정했고 나는 20대 초반의 나를 보며 좀 안타까운 것도 같다고 생각했다. 게리의 가족은 뱀이라는 이유로 당연하다는 듯이 누명을 썼고 너무 쉽게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나아가서는 모든 파충류가 포유류를 비롯한 동물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게 되었다. 동물들의 유토피아를 자처하는 주토피아가 “모든” 동물을 위한 곳은 아니었다는 게 인간들이 살아가는 사회랑 다를 바가 없어서 화가 났다.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와 자유를 준다고 믿는 현대의 체제가 정말로 공정과 평등을 보장하고 있나? 이제는 아닌 척하지도 않고 경쟁을 부추기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먼저 배척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은 자명하지 않나? 그리고 그들이 누구인지도. 마침내 기후 장벽을 만든 것이 게리의 할머니임이 밝혀지고, 원래 그들이 살던 곳으로 돌아왔을 때 뱀들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그 긴 세월을 버티고 견뎌 왔음에도 모두 주디를 안아주고 싶어 해서 또 한 번 울컥했던 것 같다. 링슬리 가족을 보면서는 괜히 팔레스타인 생각이 났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링슬리 가족처럼 귀여운 고양잇과(찾아보니 캐나다? 스라소니란다)도 아니면서 왜 난리지… 너네 뭐 되냐고. 링슬리 가족 중 유일한 순딩이 포버트를 보면서는 참 마음이 안 좋았다. 게리를 배신한 것도 이해가 가고… 게리도 왠지 이해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가족의 인정과 사랑은 누구든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거니까. 그냥 불쌍하고 안타까웠다. 그래도 안 죽고 차라리 감옥에 가서 다행이었다. 마지막에 아버지한테 파트너십에 관한 책 보여주는데 짠하고 귀엽고. 살모사 게리가 눈밭의 추위에 다 죽어가면서도 주디에게 우리는 성공할 거라고 계속 그럴 때… 처음에는 무슨 소리야! 지금 너 다 죽어가잖아ㅠㅠ 싶었는데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냥 그런 믿음 자체가 너무 눈물이 났다. 얼마나 복잡한 마음이었을까…. 내가 게리에게 Permission to hug 받아서 꼬오오오옥 안아주고 싶다…. 주토피아 최고의 디바 가젤 언니 사랑해요 3편 무조건 나올 것이고 이스터에그처럼 숨겨둔 쪽지에서 확인할 수 있던 것처럼 그리고 쿠키에서 깃털이 떨어진 것에서 알 수 있었던 것처럼 새들이 나올 텐데 과연 또 어떤 이야기를 풀어갈지 기대가 된다. 동물들로 우리 인간 사회의 문제점을 꼬집고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작품은 언제나 사랑스럽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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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드: 포 굿
영화 / TV
2025년의 첫 곡으로 Defying Gravity를 들은 것이 기억난다. 엘파바 같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서. 모두가 미워하고 손가락질 하더라도 옳은 일을 하기 위해서라면 중력도 거스르는 그런, 엘파바처럼 단단한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한 해를 어쩌면 그 이상을 살고 싶어서. 2025년을 한 달 남긴 지금, 뒤돌아보면 나는 그렇게 지내왔을까? 오즈의 거짓말에 배신감을 느끼고 사랑하는 피예로를 뒤로 한 채 날아오른 엘파바는 정말로 사람들이 말하는 나쁜 서쪽 마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때 글린다가 아니었더라면 엘파바는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글린다가 엘파바 덕분에 자신이 진정으로 좋은 사람이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는 순간, 엘파바 역시 글린다 덕분에 더 단단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엘파바에게 옳다고 믿는 일을 끝까지 해낼 용기를 준 것은 글린다였고 글린다에게 진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준 것이 엘파바였다. 물론 엘파바와 피예로가 살아 있다는 걸 알렸다면 글린다는 크게 기뻐했겠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 글린다가 앞으로는 이전과 조금 다른 삶을, 더 나은 삶을 살아갈 걸 알았기 때문에 엘파바는 피예로와 함께 오즈를 뒤로 한 채 떠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피예로의 마음이 엘파바에게 가있는 걸 알고 나서 글린다가 부르는 I’m Not That Girl은 엘파바가 1편에서 부르는 것보다 더 쓸쓸하게 느껴졌다. 엘파바가 부를 때는 기대조차 없었지만 글린다는 피예로와 결혼하기 일보 직전이었어서 더 그랬을까. 모두의 사랑을 받지만 자신이 사랑한 사람에게만은 사랑받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슬플지는 차마 짐작이 가지 않는다. 다만 그럼에도 엘파바와 몸싸움 한 번 하고는 다시 친구로 돌아간 글린다를 사랑하지 않을 수 사람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예로 캐릭터는 사실 1편에서 등장 때부터 조금 의문이 있긴 했는데 이번에 엘파바를 위하는 걸 보고 마음이 바뀌었다. 엘파바와 글린다가 행복만 하길… 기분이다! 피예로 너도 행복해라! 오즈 아저씨 너는 행복하지 마세요. 1년이라는 긴 인터미션 이후 본 <위키드 : 포 굿>은 1편 같은 강렬한 충격과 여운은 없었더라도 감동적인 마무리였다. 정말 아름다운 우정과 사랑 이야기였다. 위키드 뮤지컬도 보고 싶어졌고 오즈의 마법사 책도 다시 읽고 싶어졌다. 오즈의 마법사 영화는 아직 못 봤는데 그것도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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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없는 집
책
술술 읽히기는 했으나 별 긴장감이 없이 진행되었던 추리 소설. 마지막에 밝혀진 살인사건의 범인들은 약간 황당하기까지 했다. 갑자기 드러난 가족의 비밀 그리고 뜬금없는 여성연대까지. 율리아는 내가 기대하던 탐정은 아니었다. 사건에 집중하려다가도 갑자기 자신의 인생에 매몰되곤 한다. 비행기 사고로 온 가족을 잃은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전남편 시드니와의 이혼 후에도 계속해서 관계 회복을 꿈꾸는 율리아 자신만의 삶. 이런 트라우마와 애정에 대한 갈망은 사건을 조사하는 동안 끊임없이 그를 괴롭힌다. 그리고 독자인 나까지 괴롭혔다. 나는 살인 사건이 일어난 이유와 범인에 집중하고 싶은데 글쓴이(들)는 자꾸 율리아의 삶을 조명하며 여길 좀 보라고 내 고개를 잡아 돌린다. 그다지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탐정은 제법 냉철하고 완벽한 존재라는 걸 깨닫게 해준 책이라는 데는 의의가 있었다. 트라우마로 얻게 된 얼굴의 흉터 그리고 지팡이까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신체 접촉에 대한 과민 반응은... 뭐 다음 시리즈까지 이어 본다면 이해할 수도 있을 것도 같은데, 탐정 율리아 스타르크 시리즈를 굳이 또 찾아 읽진 않을 것 같다. 여기에 전남편에 대한 구질구질한 마음까지! 주인공에게 어느 정도 독특한 점이 있으면 흥미롭지만 너무 지나치면 지친다. 실제 인물도 아닌데, 추리 소설의 주인공 탐정인데 완벽할 것을 기대하면 안 될까? 종종 이렇게 진부한 게 좋을 때도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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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몰리션
영화 / TV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같다가도 사랑은 수많은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는 영화. 완벽한 사랑은 없지만 완벽하지 않다고 해서 사랑이 아닐 수는 없다고 말하는 영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느끼는 감정, 나의 사랑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데 걸리는 시간에 대해 무덤덤하게 말하는 영화. 영화를 처음 봤을 때와 달리 나는 데이비스가 느낀 감정을 확신할 수 없다고 느낀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대한 영화라고는 하지만 어쩌면 정말 데이비스는 줄리아를 사랑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줄리아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데이비스가 깨달은 것이 사랑이었을까? 배신감이나 분노가 아니라? 그렇다면 어째서? 한편으로는 그렇게 깨달은 사랑이라면 진정한 사랑일 것 같기도 하다…. 지난 번엔 보이지 않았던 사랑이 눈에 띄었다. 데이비스와 캐런, 데이비스와 크리스의 사랑이 그것이다. 성애와는 거리가 있지만 이해(보다 정확히는 ‘있는 그대로를 바라봄’이라고 표현하고 싶은 것)를 기반으로 한 사랑. 캐런은 데이비스의 편지를 읽고 그 속에 숨겨진 데이비스도 모르던 슬픔을 찾아내서 눈물을 흘렸다. 데이비스는 캐런의 아들 크리스를 스스럼없이 대하며 오히려 크리스에게 있는 그대로 존중받는 느낌을 주었다. 데이비스가 줄리아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이유는 어쩌면 그들의 캐런과 크리스와 함께 주고받는 감정으로 줄리아를 향한 사랑과 상실감을 묻어두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상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사랑의 힘에 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4년 전에 데몰리션을 보고 나는 이렇게 썼다. “영화에서 캐런이 듣는다고 한 그룹 하트의 Crazy on You를 들으며 나는 생각한다. 사랑을 깨닫는 데 걸리는 시간 속에도 사랑이 있다고. 사랑하는 동안에도 외로움을 느낄 수 있다고. 데이비스가 그랬던 것처럼. 종종 내가 그러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럴 수 있다고, 사랑이란 원래 그런 거라고.“ 사랑을 깨닫는 데 걸리는 시간 속에 사랑이 있다니, 참 낭만적인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고. 4년 만에 영화를 다시 보며 제법 무감해진 내가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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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내가 남자를 죽였어
책
짤막짤막한 한 장 한 장을 무덤덤하게 읽었지만 내심 치미는 울컥함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코레드였고 내 동생은 아율라였다. 비록 내 동생은 남자들을 죽이진 않았으나 나는 언제나 동생을 질투했고 증오했고 또 지나치게 사랑했다. 내가 질투와 시샘으로 가득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인정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기형도의 시를 읽으면 꼭 나를 위한 시처럼 느껴졌다. 나에게는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장점을 금방 찾아낼 수 있는 천리안이 있다. 그래서 언제나 친구들이나 연예인들의 특별한 점을 빠르게 파악해 금방 사랑에 빠졌고 그와 동시에 그들을 부러워하고 질투하게 되었다. 남들에 비하면 내가 가진 것, 내 장점은 장점도 아닌 것 같았다. 언제나 타인을 선망하고 동경하는 사람에게 제일 가까운 대상은 가족일 수밖에 없었다. 예쁘고 매력적인 내 동생은 나랑 같은 성별을 가졌고 나와 2살 차이가 났다. 나는 날이 갈수록 그 애의 좋은 점을 시샘하고 청소년기를 기점으로 그 애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그 애의 뼈밖에 없는 몸과 당당하고 자유로운 영혼을 나도 가졌으면 하고 바랐고, 충만한 자신감과 몸을 갈아서라도 해내는 책임감을, 예쁜 표정과 감각적인 사진 기술을 모두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성인이 되고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동생의 모든 것을 질투하고 시샘하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반면 그 애를 너무너무 사랑하기도 했다. 우리 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무궁무진했고 좋아하는 친구들을 만나는 것과 한평생 같이 살아온 이를 만나는 것에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었다. 동생이 우여곡절 끝에 대학을 가면서 우리는 더 자주 연락을 했고, 동생이 대학원을 졸업할 즘부터는 거의 매일같이 메신저로 킬킬거렸다. 종종 서울에서 저녁을 먹고 숨이 넘어가게 웃다가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아닌 척 금방 헤어지기도 하게 되었다. 만약 내 동생이 자신이 만난 남자들을 죽이고 나에게 연락을 했다면 나는 당장이라도 쫓아가지 않을 수 있었을까? 저 애를 고발하고 정의를 구현할 수 있었을까? 죽어도 아니었을 것이다. 나 같아도 코레드처럼 나의 아율라가 죽인 시체를 몇 번이고 처리하고 그 애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다행인 점이 있다면 내 동생은 내 직장에 관심이 없고 나 역시 내 직장에 관심이 가는 남자가 없다는 것이다. 심심할 때마다 우리 화제에 오르는 “자매의 진흙탕 싸움”이 현실적으로 우리의 일은 아니니까. 언니 코레드는 언제나 동생 아율라를 지키고 보살피는 쪽이다. 동생을 편애하는 이 세상에 대한 기대를 버린 지는 오래다. 자신이 짝사랑하는 남자까지 낚아챈 동생이 아무리 밉고 증오스러워도 동생이 그 남자를 죽이려다 되려 자신의 칼에 찔렸다면 언니가 파멸시켜야 할 것은 동생이 아니라 그 남자다.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로부터 동생을 지키던 언니는 언제까지나 동생이 안전하고 즐거운 자신만의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지켰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는 내 동생을 질투하지 않을 수는 없어도 그런 동생을 지킬 줄 아는 코레드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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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들마치 2
책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후의 이야기를 다룬 책 <미들마치>. 결혼해서, 과연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최근 들어 괜히 생각나는 ‘결혼이 덫 같아’라는 가사를 가진 그 노래를 내내 곱씹으며 책을 읽었다. 도러시아와 캐소본, 로저먼드와 리드게이트는 배우자의 단면만 보고서 결혼했기에 그들의 결혼은 불행했다. 나이 많은 캐소본은 심장마비로 떠나면서까지 도러시아를 옥죄었다. 도러시아는 그의 유산으로 자신이 이상적이라 생각하던 많은 일을 도모할 수 있었지만 자신과 래디슬로의 행복을 선택하는 데까지는 짧지 않은 기간을 보내야 했다. 그럼에도 래디슬로라는 ‘진정한 사랑’을 위해 자신이 누리던 것을 다 내던지고 뛰어드는 두 번째 인생은 분명 찬란했겠지! 리드게이트에 대해서는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그에 비해 로저먼드는 왜 이렇게까지 동정심이나 이런 감정이 안 드는지 모르겠다. 글 중간중간 로저먼드나 불스트로드 등 일부 인물에 대한 연민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장치가 뚜렷하게 나타났음에도 나는 왠지 로저먼드에게만은 마음이 가질 않았다. 예쁘고 우아하고 사치스러운 그 여자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내 안에 내재된 여성혐오일까? 프롤레타리아 정신일까? ‘마님’이라 불리는 도러시아에 대해서는 연민과 애정을 갖지만 리드게이트 ‘부인’인 로저먼드에 대해서는 얄궂은 마음뿐이니 후자는 아니겠다 싶다…. 2권을 읽으면서 케일럽 가스만큼이나 좋아진 인물은 캠던 페어브라더 목사였다. 페어브라더 역시 메리에게 호감이 있었으나 그는 메리와 프레드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마음을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프레드에게 진실되게 말하는 장면에서 나도 프레드만큼이나 감동을 받았다. 페어브라더의 고백은 프레드가 자신의 삶에 충실할 수 있도록 했고, 그래서 메리와 프레드가 결혼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했다. 피날레에서 그의 뒷이야기는 알 수 없었으나 그래도 페어브라더도 잘 살았을 거라 믿는다. 결혼이… 뭘까? 몇 년 전부터 친구들이 하나둘 결혼하고 우리도 7주년을 목전에 두고 있으려니 종종 생각해보게 된다. 그래도 여전히 먼 나라 이야기 같아서 회피 아닌 회피 중…. 때가 되면 어떻게든 되겠지. 결혼을 하게 되더라도 이 책을 교훈 삼아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나를 좀 믿고 그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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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들마치 1
책
조용하지만은 않은 작은 미들마치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과 수없이 교차하는 많은 인물들을 상상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각 사건과 등장인물에 대한 감각이 강렬하진 못했다. 다만 도러시아를 보며 예전의(또는 지금까지도의) 나를 보는 것 같아 창피하고 안타깝다가도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을 뿐이다. 20살을 전후로 한 이들이 흔히 그렇듯이 그때 내리는 결정은 완벽하지 못하다. 도러시아의 결혼처럼, 그리고 우리가 진학할 대학과 학과를 선택하는 것처럼. 그 외에 인상 깊은 인물은 케일럽 가스였는데, 그가 미들마치의 여러 세속적인 사람들과 대비되게 보여주는 점잖음은 정말 매력적이었다. 케일럽 가스에게 메리 가스라는 딸이 태어나고 자란 것은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이미 책의 뒷표지에서 어느 정도 확인했지만, 앞으로 일어날 일 중에 가장 궁금한 것은 메리와 프레드의 인생이라고 할 수 있다. 서로 호감을 지녔지만 너무 다른 두 사람이 과연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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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수가없다
영화 / TV
박찬욱의 ‘정상 가족’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봉준호가 <기생충>에서 보여준 것과는 다른 대한민국의 전형적인 정상 가족. 영화는 시작과 동시에 가부장제 속에서 흔히 상상하고 볼 수 있는 가족을 그린다. 가장의 노력으로 마련한 그린 듯한 자가와 서로 사랑하는 남성-아버지와 여성-어머니, 그리고 그들 밑에서 유순하게 자라는 두 아이들. 아이 중 하나가 예체능을 하는 것까지 너무나도 완벽하다. 그러나 이처럼 가부장 신화 속에서 견고하게 세워진 가족의 탑은 가장 유만수(이병헌)가 실직함과 동시에 조금씩 무너지게 된다. 약속한 3개월이 지나도 ‘변변한’ 일자리를 찾지 못한 가장으로서 이병헌의 선택은 꽤나 참신하다. 경쟁자를 죽이는 것. 무너져가는 탑의 내부가 곪기 시작한 것도 여기서부터다. 이병헌은 이상민을 살인하려다 염혜란의 불륜을 목격한 뒤 아내 손예진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심지어 오징어인지 오진호인지 하는 의사도 연하남이란다! 설상가상으로 아들은 엄마가 돈 때문에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절도죄를 저질렀고, 딸은 첼로에 재능이 출중한 나머지 음대 교수에게 몇백을 내고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럴수록 이병헌은 가장으로서 살인을 완벽하게 해내야 했고, 그렇게 했다. 어쩔수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정말 어쩔 수가 없던 것은 손예진이었다. 사실 이병헌이 혼자 (나름) 가장으로서의 무게를 짊어지려고 버둥거리는 동안 현실적으로 가족의 위기를 극복해낸 건 손예진이었다. 좋아하던 테니스를 관두고 치위생사로 취업한 것은 물론, 아름다운 집까지 팔아치울 작정을 한 것도 손예진이었다. 아들이 친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아들 친구 아빠에게 여지를 남긴 것도, 뒷마당에서 나온 시체를 모른 척 한 것도 손예진이었다. 아들에게까지 그건 돼지였다고 말하는 모습이란! 이병헌이 무너지는 탑의 모래를 주워 담으면 손예진은 곪은 데에 약을 발랐다. 사랑스럽게 웃는 얼굴을 계속 유지하면서. 이 구도는 이상민-염혜란 부부의 가정에서도 유지된다. 실업자 남편이 술만 퍼먹고 유의미한 성과는 가져오지 않는 동안 실질적 가장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내였다. 집이 장인 것이라는 이상민의 말이나, 자기 아버지가 카페 차려준다는 것을 마다하고 왜 고생을 하느냐는 염혜란의 말은 실제로 가정 경제를 지탱하는 건 가장이 아님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남성-가장이 이끌어가는 정상 가족의 허상이 낱낱이 드러난다. 대한민국에서 가장으로서 남성이 가질 수 있는 권위는 그를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실은 가장을 대신해서 가족의 생계를 이끌어가는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여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자명한 사실이. 아니라고 딴지 걸고 싶다고? 수많은 근현대 한국 문학에서 몸 팔고 공장에 나가 가족을 부양하는 어머니, 누나, 여동생이 등장하는 것도 다 허구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이 영화는 그런 많고 많은, 우리 사회를 반영한 작품의 연장선일 뿐이다. <어쩔수가없다>는 너무나 자명하게 가부장제와 젠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사실 이병헌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다. 지금도 썩 좋아하지 않는다. 내 별명이 이병헌인 것과는 별개이다(미주는 이민정이다). 그러나 또래 중년 남배우 중 그 정도 위상에 있는 사람 치고 연기를 정말 잘한다는 것은 이제 인정해야 하지 않나 싶다. “웅앵웅 초키포키” 말하는 수많은 탑급 남배우들 사이에서 이병헌은 솔직히 대사 전달력부터가 다르다. 이번 영화를 보면서 생각했다. 이병헌만한 탑급 중년 남배우가 없다. 이건 진짜 어쩔수가없다…. 반면 이상민은 정말 좋아한다. 사실 선배라는 호칭 대신 상민 씨라고 불리는 것을 그러려니 했을 때부터 그냥 인간적으로 그 사람이 좋았는데 이번 영화에서 보여준 연기 덕분에 정말로 더 좋아졌다. 염혜란도 좋아하는 배우이고 손예진도 그렇다. 그래서 영화 보는 내내 즐거웠다. 좋아하는 배우들의 좋아하는 연기를 마음껏 볼 수 있어서.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아, 이게 영화였지, 하는 기분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영화 내내 흐르는 첼로의 선율은 이 영화가 박찬욱이 만든 것임을 분명히 한다. 약간 서슬 퍼런 영화의 색감도, 배우들의 소박한 대사도. 박찬욱 영화는 잠깐 새벽에 꾸고 일어나게 되는 꿈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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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들의 땅
책
너를 꼭 안아주고 싶어, 꼭.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귀신처럼 톈홍과 그의 자매들, 징쯔총과 샤오촨, 밍르 서점의 두 주인과 아산의 곁을 떠돌아다니며 그들을 한 번씩 껴안고자 했다. 나는 온기도 마음도 전할 수 없는 책 바깥의 귀신이지만 그래도 닿을 수만 있다면. 타이완, 내게는 귀신들의 땅이 아닌 낭만의 땅. 많은 이에게 그럴 것이라고 생각되는 아름다운 그곳. 타이완 사람들은 자조적으로 그렇게 부른다지만 외지인에게는 너무나 아름답고 낭만적인 곳. 나는 이제야 타이베이가 아닌 용징에서, 외부인이 아닌 타이완 사람의 시선에서 타이완을 바라볼 수 있었다. 지금이야 이 근방 나라 중 제일 낫지만, 타이완에서도 소수자를 짓누르던 시절이 있었다. 이 책은 그 시절에 대한 것이었다. 동성애자를 죽이고 여자들을 업신여기던 타이완의 어느 시절에 대한, 그런 책. 그래서 천 씨네 사연많은 다섯 자매와 그들의 엄마 아찬은 핍박을 받았고, 아빠 아산과 주인공 톈홍, 밍르 서점의 두 주인과 징쯔총은 삶의 끝까지 내몰렸다. 손가락질만 당해도 아린 인간의 몸과 마음에 실제로 생채기가 남았다. 오로지 내가 존재한다는 이유로. 읽으면서 내가 아는 그리고 알지 못하는 수많은 이를 떠올렸다. T처럼 마지못해 혐오 세력에 가담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아닌 사람도 많으리라. 그리고 그들은 T처럼 사랑받지도 못하며 하물며 살해되지도 않는다. 그들에겐 그런 영예가 주어지지 않기에 더욱 당당하게 소수자의 존재가 두려움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가부장적인 전통이라고 불리는 불평등에 맞서는 여자들이 두렵고 성별이분법적 고정관념이 뿌리내린 사회에 도전하는 성소수자들이 너무나도 두렵다. 언젠가는 존재하지도 않는 자신들의 자리를 차지해버릴 것만 같아서? 아니, 이미 그들의 자리라는 건 이 사회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다양한 소수자들, 어린이와 노인, 여자와 젠더퀴어, 성소수자와 이민자와 장애인 정신병자 그리고 수많은 변두리의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걸 눈 감고 모르는 척 하려는 사람들의 자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남자들, 능력도 없고 인간도 덜 된 채 오래된 자리만 지키고 싶어하는 남자들, 이성애자들,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여긴 것이 앞으로도 당연할 것이라고 다름을 포용하지 않는 이성애자들, 청년들, 자신들은 어린 적도 없고 늙을 리도 없다고 여기는 청년들, 비장애인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줄 모르는 무식한 비장애인들, 종교인들, 잘못된 믿음으로 혐오를 정당화하는 종교인들 이 혐오자들, 모든 혐오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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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호의 악몽 2
책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으면서 다 읽은 책은 진짜 오랜만이다. 아니 처음인가? 오늘까지 반납이어서 그랬던 것도 있지만 탐험대가 테러 호를 떠나 킹윌리엄 섬에서 행군하다가 흩어진 부분부터는 진짜 정신을 못 차리고 읽었다. 크로지어가 벙어리 여자를 만난 이후부터는 실제로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여자가 툰바크와 치룬 것과 같은 의식을 치룬 뒤 탈리릭투그는 여자의 남편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어릴 적 메모 모이라 할머니와의 기억에서 늘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흰 옷을 입은 사제가 아닌 하얀 털로 뒤덮인 툰바크에게 자신을 바치는 장면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떠내려온 테러 호에 깃든 악한 이누아를 알고 미련 없이 배에 불을 지른 장면도 좋았다. 크루지어로 살아온 삶은 가슴에 넣어두고, 탈리릭투그로 또 다른 삶을 살아갈 준비가 된 것 같아서. 2권 후반부에 나오는 세드나는 이누이트 족에서 가장 유명한 신이다. 이전에 읽은 책에서 천문학자가 자신이 발견한 별에 세드나의 이름을 붙였기에 나도 대강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자른 세드나의 손가락에서 고래와 바다표범, 바다코끼리가 탄생했다. 그리고 세드나는 바다의 영혼이 되었다. 새로이 알게 된, 그리고 이 책 전반과 관련이 있는 이누이트 설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세드나가 만든 툰바크는 그의 통제를 벗어났다. ‘진짜 사람들’ 이누이트의 주술사들은 최고의 남녀 주술사들로부터 ‘시샴 이에우아’를 탄생시켜 툰바크와 소통하게 했다. 이리버스와 테러 호의 선원들이 벙어리 여자라고 부른 실나는 시샴 이에우아였다. 괴물 툰바크와 소통했고, 크로지어가 천리안을 가진 것을 알았다. 그리고 언젠가 같은 시샴 이에우아가 될 것을 알았다. 크로지어가 탈리릭투그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은 운명이었다. 그 운명을 알고 있던 것은 실나뿐이었지만. 실나가 말 대신 생각으로 전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해 크로지어는 그렇게 먼 길을 돌아왔던 것이다. 크로지어도 실제 인물이었다. 실제로 두 배가 실종된 지 거의 10년 뒤 이누이트 마을에서 그가 목격되었다고 했다. 이 책은 존 프랭클린보다 그에게 초점을 맞추어 쓰였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알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나는 정말 크로지어가 탈리릭투그든 다른 무엇이 되었든 이누이트 마을에서 고통 없이 지내다가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정말 재미있게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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