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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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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

지렁이 울음소리
책
읽는 내내 사무치게 외로웠고 쓸쓸했다. <나목>의 경아처럼 죽고 싶다가도 살고 싶었고, 마치 내가 '나목'이 된 것처럼 음울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내가 겪어본 적 없는 전쟁, 그렇지만 내 핏속에 내 전의식에 꾹꾹 새겨진 전쟁. 나는 공부를 하기 위해 북에서 서울로 내려왔다던 할아버지를 떠올리다가, 대학을 나왔다는 이유로 군대에서 구타를 당한 후유증을 끝끝내 앓았다던 우리 할아버지를 떠올리기도 했다. 두 할머니도... 그들은 어떤 삶을 살다가 갔을까? 더 이상 물어볼 수도 없는 4명의 그 시절 사람들 얼굴을 찬찬히 더듬으며 나는 그리움을 느꼈다. 그렇지만 어릴 적만큼 격정적이진 않고, 단지 미미한 그런 그리움을. 사실 나는 그 유명한 <자전거 도둑>도 어릴 때 읽지 않았다. 책을 싫어했다던가, 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1층부터 5층까지 뺀질나게 도서관을 드나들었고 새 교과서를 받으면 제일 먼저 국어 책 속의 활자부터 주르르 읽어가던 난데. 그 시절 많은 아이들이 읽었던 <자전거 도둑>을 나는 아직까지 읽어보지도 않고 그 내용도 모른 채 살았다. 그래서 박완서는 내게 아득히도 먼 사람이었다. 좀 더 자라서 <엄마의 말뚝>이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도 읽어보지 않았다. 2011년 타계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렇구나, 대단한 사람이 죽었다구나, 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10년 뒤 나온 이 책을 나는, 또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 읽었다. 그리고 이제야 그의 죽음에 아쉬움을 느꼈다. 참 많이 뒤늦게도. <지렁이 울음소리>라는 제목이 가진 역설에 이끌렸다. 책 제목이 <지렁이 울음소리>인 것도, 이 책의 처음을 장식한 글이 <지렁이 울음소리>라는 단편인 것도 좋았다. 본디 지렁이는 울음소리가 없다. 있다고 해도 우린 듣지 못하는 소리일 것이다. 주파수가 다르다던가, 너무 작은 볼륨이라던가 하는 이유로. 각자 중년과 노년이 된 제자 숙이와 욕쟁이 선생 이태우는 각자의 삶에 지긋지긋한 권태를 느끼던 중 서로를 만난다. 다방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그들은 이태우 선생의 편지로 만남의 끝을 맺게 된다. 이태우는 과연 죽었을까? 죽음으로써 지렁이 울음소리라도 토해내려던 그의 시도가 성공했을까? 숙이도 언젠간 지렁이 울음소리를 뱉을 시도를 할 것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숙이는 그냥 주어진 삶을 오래도록 권태롭게 살아가며 이태우 선생을 종종 떠올릴 것이다. 나는 그런 결말에 은근히 위안을 받았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에서 박완서는 진정으로 부끄러워 해야 할 것에 대해 생각해보길 권한다. 정말로 부끄러워 해야 할 것은 두 번의 이혼과 세 번의 결혼을 겪은 것이 아니라, 천박하고 상스러운, 명예와 권력과 재물이라는 다채로운 색안경을 쓴 마음가짐이라고, 작가는 숨김없이 말한다. 이 글은 내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인 1976년에 나왔다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수학과 같은 지식을 가르치는 학원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가르치는 학원이 필요하다는 말은 무려 5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에도 적용되는 것이라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나의 부끄러움을, 부끄러움이라고는 모르는 사람들과 조금이라도 나눌 수 있다면! 내가 부끄러워하는 만큼이라도 그들이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아니, 아니면 어쩌면 내가 느끼는 부끄러움도 부족한 것일 지도 모른다. 이런 말이 오만한 것이라면, 나도 부끄러움을 가르치는 학원에 가야할 것일 지도.... <도둑맞은 가난>은 워낙 사람들 입방아에도 자주 오르내리고 해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실로 읽어보니 차라리 상훈에 가까운 처지인 나도 그에게 부아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어디 감히 가난까지 빼앗아 가려고, 정말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다 빼앗아 가려고 들어. 상훈과 그의 아버지라는 정말 역겨웠다. 나라도, 누구라도 세간살이를 다 던지며 내쫓았을 것이다. '나'는 어릴 적 상훈만큼은 아니어도 어느 정도 유복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전의 여유롭던 생활에서 밀려나 갑자기 가난에 내던져졌고, 이를 견디지 못한 어머니는 다른 가족들과 함께 죽어버리고 혼자가 되어 자기만의 가난한 삶을 꾸려나가던 참이었다. 그런 그의 앞에 나타난 어리숙한 상훈을 나름 같은 가난의 세계에서 '거두어' 줬는데 감히 갑자기 지금까지 일은 모두 나에게 체험이었고 유의미한 경험이었다고 말을 해? 자신의 삶이 누군가에게는 스쳐 지나가는 체험거리이고 동물원 우리 안의, 철창 안의 빤히 쳐다보게 되는 구경거리라고 하면 분개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종종 사람들은 노숙인이나 쪽방촌의 사람들, 쉼터나 보호소의 이들을 그런 식으로 바라본다. 심지어 성소수자들도 그런 대상이 된다(나는 아직까지도 자기에게 게이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하던 대학 동기를 기억한다). 멀찍이 서서, 유리를 가운데에 두고 그들의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함부로 유추하면서. 정작 본인들이 그 속에 갇히게 되면 견디지 못할 것은 전혀 알지 못하고. 가난뿐만이 아니라 모든 '불행'으로 여겨지는 '다름'을 철창 안에 가두어 두고 구경하는 건 징그러운 인간들의 가장 역겨운 악취미다. <나목>을 읽으며 나는 경아가 되었다. 이름이 외자라 경아, 경아 하다가 결국 경아라고 불리게 된 스물 스물하나 되던 그 여자. 죽고 싶다가 살고 싶다가, 사랑했다가 사랑하지 않았다가, 실컷 웃다가 문득 권태롭고 짜증을 부리게 되던 그 여자. 옥희도 씨와 이어질 수 없음에 울컥 자신을 사랑해준 남자와 결혼한 그 여자. 두 오빠가 포탄에 산산조각난 것을 보고도 어머니가 계집애만 살았다고 푸념하는 걸 듣고도 그 낡은 집에 끝끝내 살던, 그 집을 허물고도 은행나무만은 남겨놓자고 주장하던 그 여자.... 사실 내가 그 여자가 되었다기 보다는 내 지난 스물 스물하나를 그 여자의 스물 스물하나에서 보았다. 그러나 그 여자와 나 사이에는 6·25 전쟁이라는 너무나도 크고 절대로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나는 내 동생을 집안에 몰래 숨기지도, 동생의 몸이 피칠갑을 한 채 조각나 있는 것도 보지 않았다. 보지 못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사실 감히 내가 경아가 되었다, 라고 하기에 나의 인생은 너무나 순탄하고 보잘 것 없었다. 다방에서 태수를 마주하고 당차게 옥희도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던 어린 경아는 중년이 되어 중년이 된 태수와 함께 죽은 옥희도의 개인전에서 그의 쓸쓸한 나목을 마주하고 나온 뒤 참을 수 없어 나이 든 남편, 태수의 이마 주름에 입술을 묻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서로 사랑하던 경아와 옥희도가 함께 할 수 있었다고 해서, 옥희도가 그의 아내와 다섯 아이들을 두고 경아를 선택했다고 해서 둘이 행복해졌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중년의 경아도 그걸 알았고 알고 있었고 그래서 더욱 사무치게 남편이, 같이 늙어 온 태수가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늙어 죽을 때까지 경아는 태수와의 결혼이 최선이었을 거라고, 아니 어쩌면 구질구질하더라도 옥희도와의 사랑을 이어나가는 게 나았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한 치의 후회도 하지 않고 계속 살아갈 것이다. 다만 참을 수 없는 울컥함을 늘 그렇듯이 견디어 내면서. <카메라와 워커>는 영동 고속도로가 뚫리던 시절, 그러니까 70년대 초반 한국 사회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불안정함을 우울하게 조명한 글이었다. 그 시절, 장성한 조카를 걱정하던 고모는 6·25 전쟁을 겪은 세대였고 비뚜름하게 자라난 조카는 여전히 휘청이던 한국 사회의 칼바람을 온 몸으로 맞이하던 세대였다. 훈이가 번듯한, 즉 대기업에 다니고 '공일에는 카메라를 들고 아이들과 놀러 나가는' 그런 가장이 되지 못한 건 절대 고모의 탓도 할머니의 탓도 아니었다. 일찍이 죽은 그의 부모 탓도 아니었다. 고모가 조카를 키워내는 데 실패했다고 느낀 것도, 조카가 고모의 기대와 어렴풋한 자신의 기대와는 영 다른 삶을 살게 된 것도 모두 그 시절의 대한민국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모든 책임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있던 것은 아니어서, 그때 그 사람들은 어디에 무슨 말도 하지 못했다. 고모가 훈이를 다시 키운다 해도 자신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부처님 근처>를 읽으면서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묻힌 만불사를 생각했다. 만불산 올라가는 길에 주르르 놓여 있는 황금색 부처님 보살님을 떠올렸다. 어릴 땐 무섭기도 하고 경이롭기도 했던 그들을. 문득 한참 멀리 있는 그곳이 그리워져 빨리 운전 연습을 해서 나 혼자라도 차를 타고 다녀와야겠다는 충동적인 생각도 들었다. 나도 그곳에 다녀오면 마음이 편안해질까? 마지막 장면에서 ‘나’의 어깨에 기대 죽은 것보다도 고요히 잠든 어머니처럼 나도 편한 잠을 잘 수 있게 될까? 그렇진 않을 것이다. 나는 사상 때문에 죽은 아버지와 오빠도 없고 그들의 장례를 20년 넘게 지내지 않지도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그만큼의 숙원은 없고, 따라서 전쟁도 사상에 따른 죽음도 겪어보지 못한 나의 모든 얕은 불운은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사상이 ‘빨갱이’ 같다고 해서 총에 맞거나 고문당하지는 않을 것이고 그로 인해 죽지는 않을 것이다. 요즘 세상을 보면 꼭 그렇지 않을 것이라 단언하는 것도 웃기긴 한데... 어쨌든 나의 고만고만한 불행을 해소할 방법은 부처님께 빌고 제를 지내는 것으로 해소되진 않을 것 같다. 책을 야금야금 읽어가며 나는 내 슬픔도 우울도 책과 하나가 되는 것처럼 느꼈다.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도 묘한 여운을 느껴 한참이나 이 글을 붙들고 있었다. 문득 경아의 어머니가 끼던 틀니의 행방이 궁금해졌다. 정말로 버렸을까? 경아가 느꼈던 것과는 또 다른 쓸쓸함을 느꼈을 그가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절을 살아낸 사람들, 전쟁을 겪고 가족과 일상을 잃은 뒤 영원히 그 전과 같이 살진 못했을 사람들에게 짙은 연민과 슬픔을 느꼈다. 그러나 이제 내 주변에 그에 대해 물어볼 사람이 없음에, 이야기를 아픔을 나눌 사람이 없기에 나 역시도 음울하게 침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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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라리스
책
한참 전에 인터넷에 종종 떠도는 글이 있었다. 목성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에 대한 소설이었는데,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짧게 연재되며 많은 사람의 이목을 끌었다. 나는 그런 설정을 정말 낭만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단 한 번도 꼼꼼하게 읽어보진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자마자 그 글을 읽었더라면, 하고 조금 후회하게 되었다. 아마 이 책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을 것이지만 그래도 괜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생전 하레이는 켈빈에게 어떤 연인이었을까? 기바리안과 스나우트, 사르토리우스과 그들의 ‘손님’은 어떤 관계였을까? …만약에 내가 ‘손님’을 맞이하게 된다면 그건 누구일까? 모든 ‘손님’이 진실을 알게 된다면 하레이처럼 소멸을 희망하게 될까, 아니면 지구에서 살았던 ‘진짜’ 하레이처럼, ‘하레이’의 속성이랄 게 소멸인 걸까? 책은 끝끝내 그 어떤 물음에도 대답해주지 않는다. 솔라리스라는 행성과 바다의 정체도, 켈빈의 미래도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생각할 거리를 끝없이 주는 것 같다가도 아예 생각이라는 걸 시작도 못 하게 하는 막막한 책. 그런데도 전 세계 사람들이 사랑하는 이유를 알 것만 같다고, 그 모호함과 막막함 자체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 중 하나가 나인 것도 같다고, 그런 생각이 들면 자만일까? 사실 솔라리스 그리고 인간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내놓지 않는 것보다도 더욱 좋았던 건 인간에 대한 작가의 평가와 나의 평가가 일치하는 맥락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나는 언제나 사람들이, 인간들이, 아니 인류 전체가 지나치게 자의식과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때론 그에 분개하고 또 때론 한심함과 안타까움도 느끼면서 나 스스로도 인간이라 가질 수밖에 없는 인간중심의 사고를 떨쳐내고 싶었다. 작가는 솔라리스학의 연대를 제시하며 그 점을 아프도록 꼬집는다. 인간이 인간이기에, 인간 중심적으로 생각한 나머지 그 바깥의 관점은 생각도 하지 못하는 것. 인간 아닌 것을 인간처럼 여기고 이해하려고만 한 것. 이 저주와도 같은 모든 것은 사실 우주로 나아가기 한참 이전부터 같은 인간끼리도 서로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하지 않으려 한 것, 자신의 입장에서 타인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원죄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이는 인간이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족쇄이기에 나는 책 속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솔라리스는 영원히 베일에 싸인 행성으로 인류에게 존재할 것이라고, 그렇게 막연히 생각했다. 인간에게 죄가 있다면 내가 아닌 이(그것이 인간이든 아니든 간에)의 입장에서 생각하려 노력하지 않는 것, 벗어날 수 없는 ‘나’ 자신만의 입장에 순순히 무릎 꿇는 것이라고. 비단 우주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인간은 지나치게 오만하다. 아직 컴퓨터도 나오기 훨씬 이전에 이 책이 나왔을 때도, 지금도, 아주 오래된 과거와 아주 먼 미래에도. 그리고 우리는 이 오만함과 비대한 자의식의 벽을 영영 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숙명이고 운명이다. 하지만 운명에 순응할 필요가 있나? ‘우리’가 아닌 다른 많은 이들을 면밀하게 고려한다면, ‘우리’의 범위가 넓어질 지도 모른다. 혹시 몰라, 언젠가는 솔라리스도 ‘우리’가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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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
책
좋아하는 작가와 관심사가 겹친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것처럼, 그래서 작가를 좋아하냐 좋아했는데 우연히 그 작가와 관심사가 같냐 하는 느낌도 없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곽재식이라는 사람과 그가 풀어내는 이야기, 그 속에 담긴 함의를 진심으로 좋아한다. <한국 괴물 백과>를 읽을 때까지만 해도 그저 흥미로운 옛날 이야기를 많이 아는 사람이구나 했다. 평교가 주최한 온라인 북토크에서 그에게 질문했다가 받은 <곽재식의 미래를 파는 상점>을 읽을 때는 내 관심 분야에 대한 나의 견해와 그의 견해가 유사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이번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를 읽으면서는…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그건 그와 내가, 만난 적이라고는 온라인으로 딱 한 번 만난 게 다인(심지어 나만 그의 얼굴을 보고 그는 내 얼굴도 모른다) 우리가 꼭 겹치는 것 같은 느낌과도 같았다. 나의 낭만과 그의 낭만이 같은 방향성을 갖고 나의 문제의식과 그의 문제의식이 마주 보는 것과 같은 기분, 그 이상이었다. 그래서 나는 확신하게 되었다. 이 사람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구나, 하고. <달과 육백만 달러>는 얼결에 싱글대디가 된 남자가 다섯 살 딸에게 엄마를 찾아주는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이원이가 어쩌다 태어났고, 어쩌다 친엄마를 떠나 웬 국회의원 부부를 거쳤다가 주인공에게 오게 되었는지 걱정되었다. 그러나 주인공이 어린 이원이에게 맞추려고 고군분투하는 것이나, 전 애인이던 이원이의 친엄마를 찾아 딸과 함께 호주로 떠나는 걸 보면서는 갑자기 아빠가 된 것 치고 책임감 있게 행동하려 노력하는 주인공이 멋지게 느껴졌다. 반면 혼자 이원이를 낳았을 여자에 대해서는 가엾다고 느끼다가 점점 호감도가 떨어지고 있었는데, 마지막에 우주비행사로서 달에 간 것을 보고는 아! 하지만 텔레비전에 나오는 이원이 엄마를 보며 이원이 아빠가 사랑을 느끼는 걸 보며 왠지 엄마도 아빠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을 했다. <최악의 레이싱>은 책이 쓰인 2000년대 대학 캠퍼스와 그 시절의 풋사과 같은 사랑을 떠올려볼 수 있게 한 글이었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타지도 못하는 자전거를 태워주겠다고 하고, 또 그 말을 지키기 위해 일주일간 고군분투를 하는 남자. 사실 대학생이라고 하면 남자라고 하기에도 아직은 좀 어린 느낌이 (이제는) 드는데, 그래서 그런지 더 응원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온갖 친구와 선배, 심지어 교수님까지 끌어들인 자전거 대작전은 사실 그 모든 걸 알고 있던 앙큼하고도 사랑스러운 ‘그녀’가 톡 쏘는 고백을 함으로써 최종 성공으로 끝난다. 자신이 매일같이 자전거 타기 연습을 하며 넘어지고 또 넘어지던 것을 보고도 모른 척했다는 걸 안 주인공은 꽤나 부끄럽고 창피했겠지만, 이제는 여자친구가 된 그녀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그래서 더 좋아졌을 수도 있을걸? 나 같으면 그랬을 거다. 거짓말을 한 건 괘씸할 수 있지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랬다고 하면 제법 귀엽잖아. 누군가가 생각이 나서 더 킥킥거리며 읽었던 것 같다. <달팽이와 다슬기>는 앞의 두 이야기에 비해 너무 마음이 아픈 이야기였다. 이 글은 2007년에 쓰였고 책은 2013년에 나왔는데 지금이야 흔하다지만 당시에는 가시화조차 크게 되지 않았던 다문화가정에 대한 차별적 시선을 이렇게 담담하게 풀어내다니. 마침 2007년 당시 주인공과 동년배였던 나의 초등학생 시절을 떠올려보면 실제로 있었을 법도 한 일이라 더욱 울적했다. 그로부터 근 20여 년이 지난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도 여전히 다문화가정과 그 구성원을 향한 편견과 차별이 많이 남아있음을 생각하면 정말 우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왕>은 역시 2000년대의 어렴풋한 기억으로 풋풋하게 읽었던 것 같다. 비록 남산에 자물쇠를 채우진 않았지만 기념일에 근처 식당에서 자물쇠와 열쇠를 나눠가졌던 내 반쪽도 생각이 났다. 1년 전 대학 때문에 헤어진 여자친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벨기에 왕 앞에서 알지도 못하는 불어로 열심히 말을 하는 20살 남자애. 비록 커서 그 애와 결혼하진 않았더라도 여자친구 마음에는 평생 남을 소중한 기억일 것이다. 치기 어린 사랑은 완벽하지 않고 완성되지 않아서 그 자체로 좋다. 그래서 둘이 함께하지 않은 결말도 정말 좋았다.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는 낭만 치사량의, 정말 최고로 사랑스러운 중편 소설이었다. 백두산이 폭발해 비행기가 뜰 수 없게 되자 태평양 반대편으로 지구를 반 바퀴 넘게 돌아온 새신랑. 연이은 불운에도 어떻게든 방법을 모색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 남자. 미국에서 영국으로, 영국에서 터키, 몽골과 중국을 가로질러 북한까지 간 남자는 마지막 15km를 두 발로 달려 남한과 북한의 경계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여인에게 도착한다. 결혼식 한 시간 전에. 결혼식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남자는 깨닫는다. 결혼한다고 갑자기 세상이 달라지진 않을 거라고. 사랑하는 여자가 미워 보이는 날도 있을 것이고 함께 사는 게 호락호락하지 않을 날도 있을 거라고. 그럼에도 그 남자는 여자와의 결혼식을 위해, 여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시간 맞춰 한국으로 돌아갔다. 수많은 고난과 좌절에도 거리낌 없이, 주저함 없이. 여자가 방글라데시인이고 이슬람교도라고 반대하던 남자의 부모도 하물며 백두산 폭발도 그 무엇도 두 사람의 사랑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런 게 진짜 사랑인 것 같다. 처음 만난 순간처럼 뜨겁진 않더라도 그때 그 마음을 식지 않고 이어갈 수 있는 것. 이 글을 읽으며 나는 문득, 나도 결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7년이 넘게 내 곁에서 매일같이 있는 어떤 사람을 떠올리며. 괴물 이야기, 미래 이야기뿐만 아니라 사랑 이야기도 내 마음에 꼭 맞게 쓰는 사람, 곽재식. 트위터나 포스타입 계정을 보면 어쩐지 옆집 아저씨, 삼촌 같은 친근함도 느껴지는 작가, 곽재식. 곽재식이 낸 책들을 다 읽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지금처럼 차근차근 읽어나가면 언젠가는 그가 책을 내는 속도도 따라잡을 수 있지 않을까? 틈틈이 포스타입 글도 읽어야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낭만적인 이야기를 쓸 줄 아는 사람의 글은 단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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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브스 아웃: 웨이크 업 데드 맨
영화 / TV
죽은 사람이 절대로 하면 안 되는 일 1위가 부활인데… 보는 내내 진짜로 죽은 몬시뇰이 일어날까봐 걱정했고 실제로 일어나(는 것처럼 보여)서 경악했다. 부제 정말 잘 지었군! 블랑이랑 또이또이할 정도로 신앙이 없는 편이기에 초반에는 완전 아멘 영화네 했으나 마지막에 마사가 죽어가며 고해성사를 할 때는 나까지 아멘 하고 있었다. 그만큼 몰입이 잘 되는 영화였다는 뜻. 전직 복싱 선수였던 주드 신부가 좌천되듯이 간 성당에는 몬시뇰 윅스가 군림하고 있었다. 주드는 몬시뇰의 설교와 몬시뇰이 교회를 이끌어가고 신도들을 대하는 방식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기에 그가 죽었을 때 너무나 당연하게 유력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범인은 주드가 아니었고. 이번 3편도 재미는 있었으나 전작들에 비해 좀 아쉬운 감이 있었다. 일단은 영화 스토리 라인이 전반적으로 매가리가 없었다. 영화 내내 주드가 아닌 진짜 범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하고는 있지만 그를 찾는 데에 전력을 다하기보다는 글쎄… 대체 무엇에 전력을 다하셨나요? 범인 찾기도 아니고, 주드나 몬시뇰, 마사의 서사도 아니고 이러면 진짜 그냥 회개한 젊은 신부의 주드의 아멘 이야기밖에 더 되나…. 게다가 마사가 너무 갑자기, 순순히 고해성사를 하고 죽음으로써 영화가 갑자기 푸시식 하고 김 빠지듯이 끝나는 느낌도 있었다. 탐정으로서 블랑의 능력이 발휘되지도 않았고, 진범이 밝혀지는(고해하는) 순간이 그닥 극적이지도 않았고, 사람은 많이 죽었고, 뭐 어떡할까요. 다만 마음에 들었던 것은 주드와 몬시뇰의 대치를 통해 현대 사회가 지향해야 할 바를 시사하는 점이었다. 물론 그것도 좀 종교적이라 썩 내키진 않지만, 블랑도 신앙이 없는데 열심히 추리했다고 생각하면 나도 못 쓸 건 없다고 생각도 든다. 몬시뇰은 그의 설교에서도 언급되는 가부장제와 여성 혐오로 대표되는, 낡은 기독교적 가치를 상징한다. 혼외자로 자신을 낳은 자신의 어머니 그레이스를 ‘음탕한 창녀’라고 공공연하게 부르며 증오하는 동시에 싸이가 자신의 혼외자임을 밝히는 데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다. 이 사실이 밝혀질 때 몬시뇰로부터 등 돌린 베라와 시몬은 여성이고, 그럼에도 지지함을 밝힌 리와 냇은 남성이라는 점도 몬시뇰이 상징하는 남성 우월적인 가치관을 뒷받침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낡은 것이고 옳지 않은 것이며, 무덤에 들어가야 하고 부활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설령 부활했더라도 그것은 거짓이고 다시 무덤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라고, 이 영화는 그렇게 말한다. 반면 주드는 새로운 시대의 가치를 상징한다. 주드는 곪을 대로 곪은 성당에 새롭게 부임한 신부로, 성당을 그대로 방치하기 보다는 더 나은 곳으로 바꾸고자 하는 열의를 의미한다. 이는 몬시뇰과 대척되는 점에 있는 진실과 정의, 평등과 존중을 뜻하기도 한다. 주드는 몬시뇰을 죽이지 않았음에도 죄책감에 시달렸고 추후 샘슨의 죽음도 자신의 일이라 여기고 자수하려 하는 모습을 보인다. 죽어가며 고해성사하는 마사에게도 그가 증오했던, ‘음탕한 창녀’로 패싱되었던 ‘여성’ 그레이스에게 용서를 구할 것을 청한다. 생각해보면 성당에 있던 이들 중 그레이스를 가엾다고 느낀 사람은 주드가 처음이기도 했다. 남성이 여성에게 씌운 창녀, 더러움이라는 프레임을 걷어내고 그가 받았을 핍박과 고통에 응할 줄 아는 사람, 그를 가여이 여길 줄 아는 사람인 주드는 낡은 성당을 대신할 새로운 성당이다. 이로부터 낡은 세상이 아닌 새로운 세상이 나아갈 방향이 제시되고 더 나아가 진정으로 예수의 가르침-사랑-을 실천하는 신자의 모습이 제시된다. 이는 신앙의 유무를 떠나 모든 사람에게로 확대되고,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이번에도 아는 얼굴들이 둘이나 나왔는데, 다니엘 크레이그는 어제 본 <글래스 어니언>과 달리 꽤나 머리가 길어 있어서 처음에는 못 알아봤다. 정말 죄송하지만 짧은 머리가 더 탐정스러우세요. 반가운 얼굴 둘은 내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배우인 밀라 쿠니스 그리고 호크 아이 배역 때문에 그닥 좋아하지는 않는 배우인 제레미 레너였다. 밀라 쿠니스는 지금껏 내가 본 모든 그의 필모 중에서 제일 진중한 역할로 나왔는데, 몬시뇰 윅스 살인 사건의 담당 경찰로 등장해서 블랑과 주드 신부와 함께 이야기를 이끌어 갔다. 주연이라기엔 약간 주조연 같은 느낌이긴 했는데 그래도 정말 오랜만에 봐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나이를 먹어가는 것 자체가 아름답다는 걸 다시금 느끼게 해준 사람! 쓰다 보니 굉장히 길어졌는데 그렇게까지 재밌게 보진 않았다. 다만 생각할 거리가 많았던 영화였다. 4편이 나오려나? 언제 나올진 모르겠으나 다음에는 생각할 거리도 좋지만 더 짜릿짜릿한 추리를 가져와주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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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브스 아웃: 글래스 어니언
영화 / TV
공개된 지 3년이 지나서 갑자기 본 <글래스 어니언>. 2021년에 본 <나이브스 아웃>은 기대 이상이었는데 후속작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지난 영화에서는 블랑이 거의 혼자 모든 추리를 해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번에는 카산드라 브랜드의 쌍둥이 헬렌과 함께 마일스의 거대한 (척하는) 음모를 풀어냈다. 마일스가 비열하게도 냅킨을 불태워버렸을 때는 정말 화가 나면서도 절망적이었는데, 헬렌이 수소 연료로 지어진 별장 전체를 태우는 것으로 되갚아줄 때는 이보다 더 통쾌할 순 없겠다 싶었다. 차원이 다른 복수에 짜릿함을 느끼던 것도 잠시, 마일스를 추종하던 친구들이 그에게서 등 돌리는 것을 보면서는 복잡다단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 법정에서 마일스가 아닌 앤디를 위해 증언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하지만 그들과 마일스 사이의 수많은 끈을 보며 이제는 일명 ‘어른의 사정’이랄 것도 이해가 안 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헬렌의 용기와 끈기가 더 빛났다. 정의와 진실, 그리고 사랑하는 언니를 위해 목숨까지 내던진 헬렌은 마일스와 그 친구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훨씬 ‘인간답다’는 말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다니엘 크레이그 외에도 아는 얼굴들이 둘이나 나와서 좋았다. 버디 제이 역에는 케이트 허드슨이, 클레어 역에는 <완다비전> 시리즈의 애거사로 친숙한(지금 보니 <배드맘스> 시리즈에도 나왔군) 캐서린 한이 나를 반겼다. 케이트 허드슨은 이래저래 아는 얼굴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아까 영조랑 얘기한 <스켈레튼 키>에서도 주인공이었다는 걸 방금 검색하다가 알게 되었다. 갑자기 정말 가까워진 느낌! 아는 얼굴들이 많다는 건 나쁘지만은 않은 일인 것 같다. 내일은 빠르게 데드 맨스 어쩌고를 봐 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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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톨스토이 문학전집 2)(반양장)
책
톨스토이가 이 작품으로 부활시킨 것은 네흘류도프와 카츄샤만이 아니었다. 그 시절 러시아와는 동떨어진,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나와 같은 사람도 이 책을 읽음으로써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일주일이 안 되는 시간 동안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네흘류도프와 카츄샤에 대한 나의 마음이, ‘범죄자’라고 불리는 이들과 모두가 우러러보는 명예와 권력을 가진 이들에 대한 나의 시선이 서서히 바뀌는 것을 느꼈다. 그중 가장 놀라웠던 것은 나의 분노와 증오도 사랑과 용서로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의 탄생이었다. 처음 나의 분노는 네흘류도프를 비롯한 남자들을 향했다. 카츄샤로 하여금 어려운 길을 걷게 만든 것은 네흘류도프와 다른 남자들이었다. 특히나 네흘류도프가 진심으로 그의 마음을, 몸을 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카츄샤는 타락(여전히 이 단어가 맞는진 모르겠지만)의 길을 걸었다. 그래서 괘씸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징역형을 기다리고 있는 카츄샤를 보고 나서야 자기 잘못을 깨닫다니. 그것도 자신은 떵떵거리며 배심원석에 앉아서. 당연히 카츄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카츄샤와 결혼하겠다는 다짐도 자의식과잉처럼 느껴졌다. 카츄샤의 지난날에 대한 보상으로 자신과의 결혼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으로 지난 세월과 그간 그가 받은 고통에 대한 보상이 완벽히 이루어지나? 그리고 카츄샤가 그걸 진정으로 원하는지 아닌지 어떻게 확신을 하나? 한참이나 고까운 눈으로 네흘류도프를 바라보았다. 변호사를 선임하고 이리저리 청원서를 쓰는 것이 카츄샤를 위한 척 시혜적으로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한 일로만 보였다. 그러나 네흘류도프는 카츄샤를 위해, 그리고 카츄샤와 함께 수감된 다른 이들을 위해 판사와 변호사 등 고위 관료들을 만나며 실제로 정말로 생각의 변화를 겪었다. 어느 순간 네흘류도프가 진심으로 변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사유재산, 특히나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그의 믿음으로부터 나온 행동-실제로 경작하는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는 것-을 보며 느꼈다. 물론 오랜 기간 사치스럽고 여유로운 생활을 해온 네흘류도프는 자신의 것이라 여기던 많은 것을 포기하는 게 정말 맞는 일인지 고민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면모가 오히려 네흘류도프가 ‘사람다운’ 사람임을 보여주는 지표처럼 여겨졌다. 카츄샤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맑은 그의 마음이 그의 깊은 곳에 살아 있으며, 다만 방탕하고 이기적인 생활 밑에 숨겨져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네흘류도프는 카츄샤를 위해 감옥의 안과 밖을 같은 시간 속에서 경험하며 사회의 부조리함을 깨닫는다. 그러한 깨달음이 가장 잘 드러난 부분은 배심원으로서의 둘째 날, 매트를 훔칠 수밖에 없던, 자신의 죄를 시인한 청년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였다. 230쪽에서 네흘류도프는 생각한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저 청년이 특별히 악한 사람이 아니라 가장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은 지극히 분명하다. 그리고 청년이 저런 사람이 된 것은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그런 사회적 환경에 놓였기 때문이다. 이런 청년이 사회에 생기지 않게 하려면 사람이 불행하게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사회적 환경을 먼저 없애는 것이 당연한 순리다. / 그런데 우리는 무얼 하고 있는가? 저런 청년과 같은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체포되지 않고 있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우연히 우리 손아귀에 들어온 저 청년만을 감옥에 처넣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게 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지극히 위험하고 의미 없는 일을 해야만 하는 환경으로 내몬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이와 같은 사회 구조의 병폐가 100년도 더 지난 한국에도 적용된다는 것에 통탄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렀음에도 다른 나라, 다른 사회에서 동일한 부조리가 발견된다면 이건 인간의 본성인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니 인간이 너무너무 미웠다. 증오스럽고 역겹기 짝이 없었다. 약하고 위기에 처한 사람들의 사정은 생각하지도 않고 무작정 손가락질하고 처벌하는 가장 보통의 사람들이 너무 끔찍했다. 231쪽에서 네흘류도프는 다시 생각한다. ‘만약 이런 사람들에게 주는 월급 중 단 100분의 1만이라도 사회에서 버림받은 존재들을 도와주는 데 돌리면 어떨까? 우리는 우리의 안전과 생활의 편리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노동과 용역을 제공하는 사람들로만 여기고 있는 이들을 도와주자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청년을….’ 작중 추후 카츄샤가 함께 지내게 된 정치범들 중 누군가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노동의 가치가 인정받아야 한다는 의견이 지지를 받는, 공평하고 평등한 세상을 위해 부유한 이가 그렇지 않은 이에게 나누는 것에 대한 언급이 금기시되지 않는 사회가 이 책의 배경이었던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오히려 10여 년 전보다도 이와 같은 생각이 억압받고 있는 걸 생각하면 참으로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 2025년에 ‘빨갱이’라는 단어가, 그것도 누군가를 조롱하고 낙인찍기 위해 사용되고 있을 수가 있지? 힘들게 삶을 영위하고 있는 타인을 위해 내가 가진 것을 나누자는 의견이 무슨 문제가 되지? ‘자유’라는 말에 지나치게 사로잡힌 이들이 자신의 자유를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 양 굴 때마다 지친다. 네흘류도프가 관리들, 판사와 검사, 변호사와 감옥 소장, 간수, 호송병들에게 느낀 역겨움을 나도 매일같이 느끼고 있었다. 다만 나는 권력보다도 인터넷에서 손가락을 놀리며 ‘자유로운’ 의견을 배설할 권리를 가진 이들 전반에 대한, 좀 더 폭넓은 혐오감에 심각하게 지친 상태였다. 네흘류도프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된 것은 이쯤부터였다. 257쪽의 서술은 꽤나 파격적이라 놀랐다. 글의 말미에 네흘류도프가 마태복음을 읽으며 그리스도를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고려했을 때 더욱 그랬다. 사실 이건 내가 종교 전반에, 특히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무지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감옥에서 죄수들을 모아 미사에 참석하게끔 하는 장면을 그리며 톨스토이는 말한다. ‘이 미사에 참석한 그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곳에서 이루어진 모든 일들이 사실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성 모독이며 조소를 퍼붓는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사제가 들고 들어와 사람들에게 입맞춤을 시킨, 끝에 칠보 구슬을 매달아 장식한 황금 도금의 십자가는 예수가 이곳에서 그의 이름으로 행해진 이 모든 일을 금지했다는 이유로 매달려 처형당한 처형대의 모양을 본뜬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굉장히 공감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당시 이런 서술이 이단적이라고 여겨지진 않았나 궁금했다. 러시아 정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적지만 당시 러시아의 많은 미사가 이처럼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을 때, 이는 미사를 진행하는 사제들 나아가 그들이 대변하는 종교, 러시아 정교의 전반적인 형식에 대한 도전이 아니었을까? 여기까지 쓰고 작가 연보를 보는데 아니나 다를까 1899년 장편 소설 <부활>을 발표하고 1901년 2월에 러시아 정교로부터 파문당했다고 적혀 있다. 아마 이 소설 덕분이었을 것 같다. 800여 쪽에 달하는 작가정신 출판의 <부활>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책의 3/4를 조금 넘긴 뒤에 나온다. 작열하는 7월, 이송을 위해 죄수들은 뙤약볕에서 몇 시간이고 걸어야 했다. 그 결과 가장 약한 이들 5명이 일사병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유형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감옥에서 나온지 하루도 되지 않아 비참하게 죽어버린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보고도 호송 장교, 간수장, 경찰, 경찰서장, 그리고 죄수들과 아주 먼 곳에서 이를 지시한 주지사까지 많은 이들이 아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그 무엇도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에 개탄하며 네흘류도프는 635쪽에서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비록 한 시간만이라도 그리고 아주 예외적인 어떤 한 경우에 국한된다고 할지라도 인간을 사랑하는 감정이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그러면 범죄가 없을 텐데.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죄를 짓고도 자기는 죄가 없다고 여기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을 텐데.’ 이미 여기서 네흘류도프는 부활을 예고하고 있었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사랑! 다른 이를 가엾게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하다면 범죄에 대한 선고도, 범죄도 없을 것이다. 심판받을 이도 심판할 이와 동등한 인간임을 안다면, 그러므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심판할 권리가 없음을 깨닫는다면! 어째서 누군가는 남들보다 돈이, 땅이 많다는 이유로 그들 위에 군림하는가? 돈과 땅이 있으면 권력이, 또 권력이 있으면 돈과 땅이 생긴다는 걸 아는 사람들은 욕심내는 것을 멈추지 못하고 더욱 긁어모으려고 한다. 그럴수록 가진 이는 더 갖게 되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더 가난해진다. 그리고 가진 이의 그렇지 못한 이에 대한 착취도 점점 더 당연한 것이 된다. 이게 다 욕심 때문이다. 그렇다면 욕심을 내지 못하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소유할 수 없게, 토지라든가 하는 것을 소유할 수 없게 한다면… 그 무엇을 한계 짓지도 그 무엇으로부터 한정 받지도 않는 그 노인처럼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쓰고 보니 아직 나는 분노 대신 사랑을, 증오 대신 용서를 실천할 준비가 안 된 것도 같다. 깨달음과 행동하는 것은 역시 많이 다르구나. 반성 또 반성. 비록 네흘류도프는 카츄샤와의 결혼이라는 맨 처음의 목표를 이루진 못했다. 카츄샤 역시 네흘류도프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음에도 그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시몬손을 택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라는 타인을 위한 변화가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변화를 겪었다. 그리고 부활했다.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네흘류도프는 카츄샤와 결혼하지 못했으나 좌절하지 않았다. 대신 카츄샤와의 재회, 그리고 그 이후로 겪고 깨달은 모든 것으로부터 더 많은 사람을, 가장 인간다운 인간들을 위하고 사랑할 미래를 향해 나아가며 이야기가 끝이 난다. 책은 여기서 끝났지만 네흘류도프의 삶은 이제 다시 시작이라는 것을 안다. 카츄샤도 그렇다. 그리고 나도, 이 책을 통해 부활을 겪은 나 역시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준비가 된 것 같다. 사랑으로 가득한 새로운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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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토피아 2
영화 / TV
내가 이걸 보려고 20대를 살아냈구나…. 10년을 기다린 게 아깝지 않을 정도로 너무너무 좋았다. 주디 홉스와 니콜라스 와일드가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상대임을 닉도 알고 주디도 알고 우리 관객들도 알게 해준 2편 정말 감동 그 자체였다. 사랑이 뭘까? 고개를 들어 닉주디를 보게 하라…. 1편에서는 사랑일 듯 우정일 듯 긴가민가한 닉과 주디의 관계가 차곡차곡 쌓여갔다면 이번 2편에서는 둘의 관계가 단순 우정은 아님을 보여주는 데 큰 의의가 있었다. 허니문 산장으로 올라가는 길부터 본격적으로 둘의 관계가 우정 이상임이 드러나는데, 주디가 선물로 준 볼펜을 실수로 떨어뜨려 박살이 나자 둘의 관계에도 균열이 생겼다. 주디는 속상해서 아무 말도 안 하고 계속 암벽을 타고 올라가기만 했고 닉도 그랬다. 그런데 그런 닉의 침묵이 단순히 미안함에서 오는 게 아닌 게 보여서 나는 너무 심란했다…. 그런데 산장에서 서로 마음 터놓고 이야기도 못 하고 헤어지게 되어서 정말 머리를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전개상 엔딩에서는 둘 다 살아서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파트너라고 얘기하겠지! 그렇지만 둘은 그걸 몰랐을 거고 주디는 닉이 잡혀갔을 줄만 알았을 거고 닉은 주디의 생사도 모르고 걱정했을 거고… 정신병이 온다는 너무 수동적이다. 내가 정신병에게로 간다(당사자성 발언). 그렇게 아무 말도 못 하고 산장에서 헤어진 이후 한참이 지나서야 둘은 솔직한 마음을 말할 수 있었다. 닉이 해독펜을 던져 주디를 살리고 주디가 떨어지는 닉의 손을 잡아서 살린 이후에. 서로 생사도 확인하지 못하고 떨어져 있는 동안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 모든 일이 다 끝나고 닉도 주디도 횡설수설하면서 그제야 진짜 자기 마음을, 네가 내겐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고백하는데 어떻게 눈물이 안 나냐고…. 닉주디 관계성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이면 엉 하고 울어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상영관에서 나만 울었다고 하지? 진짜 아 도저히 안 되겠다 둘이 빨리 결혼해라 애초에 둘이 서로 상처 주고 상처받은 이유가 너무 다른 둘이 서로를 너무 아끼고 사랑해서라는 게… 벅차기도 하고 이해가 가기도 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해내고야 마는 정의로운 주디와 되도록 쉽게 살고 싶은 닉이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갈등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1편 볼 때는 주디의 시선으로 닉을 봤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자꾸만 닉의 시선에서 주디를 보게 되었다. 어른이 된 걸까? 나이가 들면서 점점 주디보다는 닉에 가까워지는 내가 아쉬웠다. 그렇지만 닉이 주디를 보는 것처럼 나도 조금 어렸던 나를 되돌아볼 순 있었다. 다만 닉은 주디가 행여나 다칠까 걱정했고 나는 20대 초반의 나를 보며 좀 안타까운 것도 같다고 생각했다. 게리의 가족은 뱀이라는 이유로 당연하다는 듯이 누명을 썼고 너무 쉽게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나아가서는 모든 파충류가 포유류를 비롯한 동물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게 되었다. 동물들의 유토피아를 자처하는 주토피아가 “모든” 동물을 위한 곳은 아니었다는 게 인간들이 살아가는 사회랑 다를 바가 없어서 화가 났다.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와 자유를 준다고 믿는 현대의 체제가 정말로 공정과 평등을 보장하고 있나? 이제는 아닌 척하지도 않고 경쟁을 부추기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먼저 배척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은 자명하지 않나? 그리고 그들이 누구인지도. 마침내 기후 장벽을 만든 것이 게리의 할머니임이 밝혀지고, 원래 그들이 살던 곳으로 돌아왔을 때 뱀들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그 긴 세월을 버티고 견뎌 왔음에도 모두 주디를 안아주고 싶어 해서 또 한 번 울컥했던 것 같다. 링슬리 가족을 보면서는 괜히 팔레스타인 생각이 났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링슬리 가족처럼 귀여운 고양잇과(찾아보니 캐나다? 스라소니란다)도 아니면서 왜 난리지… 너네 뭐 되냐고. 링슬리 가족 중 유일한 순딩이 포버트를 보면서는 참 마음이 안 좋았다. 게리를 배신한 것도 이해가 가고… 게리도 왠지 이해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가족의 인정과 사랑은 누구든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거니까. 그냥 불쌍하고 안타까웠다. 그래도 안 죽고 차라리 감옥에 가서 다행이었다. 마지막에 아버지한테 파트너십에 관한 책 보여주는데 짠하고 귀엽고. 살모사 게리가 눈밭의 추위에 다 죽어가면서도 주디에게 우리는 성공할 거라고 계속 그럴 때… 처음에는 무슨 소리야! 지금 너 다 죽어가잖아ㅠㅠ 싶었는데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냥 그런 믿음 자체가 너무 눈물이 났다. 얼마나 복잡한 마음이었을까…. 내가 게리에게 Permission to hug 받아서 꼬오오오옥 안아주고 싶다…. 주토피아 최고의 디바 가젤 언니 사랑해요 3편 무조건 나올 것이고 이스터에그처럼 숨겨둔 쪽지에서 확인할 수 있던 것처럼 그리고 쿠키에서 깃털이 떨어진 것에서 알 수 있었던 것처럼 새들이 나올 텐데 과연 또 어떤 이야기를 풀어갈지 기대가 된다. 동물들로 우리 인간 사회의 문제점을 꼬집고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작품은 언제나 사랑스럽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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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드: 포 굿
영화 / TV
2025년의 첫 곡으로 Defying Gravity를 들은 것이 기억난다. 엘파바 같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서. 모두가 미워하고 손가락질 하더라도 옳은 일을 하기 위해서라면 중력도 거스르는 그런, 엘파바처럼 단단한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한 해를 어쩌면 그 이상을 살고 싶어서. 2025년을 한 달 남긴 지금, 뒤돌아보면 나는 그렇게 지내왔을까? 오즈의 거짓말에 배신감을 느끼고 사랑하는 피예로를 뒤로 한 채 날아오른 엘파바는 정말로 사람들이 말하는 나쁜 서쪽 마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때 글린다가 아니었더라면 엘파바는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글린다가 엘파바 덕분에 자신이 진정으로 좋은 사람이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는 순간, 엘파바 역시 글린다 덕분에 더 단단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엘파바에게 옳다고 믿는 일을 끝까지 해낼 용기를 준 것은 글린다였고 글린다에게 진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준 것이 엘파바였다. 물론 엘파바와 피예로가 살아 있다는 걸 알렸다면 글린다는 크게 기뻐했겠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 글린다가 앞으로는 이전과 조금 다른 삶을, 더 나은 삶을 살아갈 걸 알았기 때문에 엘파바는 피예로와 함께 오즈를 뒤로 한 채 떠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피예로의 마음이 엘파바에게 가있는 걸 알고 나서 글린다가 부르는 I’m Not That Girl은 엘파바가 1편에서 부르는 것보다 더 쓸쓸하게 느껴졌다. 엘파바가 부를 때는 기대조차 없었지만 글린다는 피예로와 결혼하기 일보 직전이었어서 더 그랬을까. 모두의 사랑을 받지만 자신이 사랑한 사람에게만은 사랑받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슬플지는 차마 짐작이 가지 않는다. 다만 그럼에도 엘파바와 몸싸움 한 번 하고는 다시 친구로 돌아간 글린다를 사랑하지 않을 수 사람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예로 캐릭터는 사실 1편에서 등장 때부터 조금 의문이 있긴 했는데 이번에 엘파바를 위하는 걸 보고 마음이 바뀌었다. 엘파바와 글린다가 행복만 하길… 기분이다! 피예로 너도 행복해라! 오즈 아저씨 너는 행복하지 마세요. 1년이라는 긴 인터미션 이후 본 <위키드 : 포 굿>은 1편 같은 강렬한 충격과 여운은 없었더라도 감동적인 마무리였다. 정말 아름다운 우정과 사랑 이야기였다. 위키드 뮤지컬도 보고 싶어졌고 오즈의 마법사 책도 다시 읽고 싶어졌다. 오즈의 마법사 영화는 아직 못 봤는데 그것도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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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없는 집
책
술술 읽히기는 했으나 별 긴장감이 없이 진행되었던 추리 소설. 마지막에 밝혀진 살인사건의 범인들은 약간 황당하기까지 했다. 갑자기 드러난 가족의 비밀 그리고 뜬금없는 여성연대까지. 율리아는 내가 기대하던 탐정은 아니었다. 사건에 집중하려다가도 갑자기 자신의 인생에 매몰되곤 한다. 비행기 사고로 온 가족을 잃은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전남편 시드니와의 이혼 후에도 계속해서 관계 회복을 꿈꾸는 율리아 자신만의 삶. 이런 트라우마와 애정에 대한 갈망은 사건을 조사하는 동안 끊임없이 그를 괴롭힌다. 그리고 독자인 나까지 괴롭혔다. 나는 살인 사건이 일어난 이유와 범인에 집중하고 싶은데 글쓴이(들)는 자꾸 율리아의 삶을 조명하며 여길 좀 보라고 내 고개를 잡아 돌린다. 그다지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탐정은 제법 냉철하고 완벽한 존재라는 걸 깨닫게 해준 책이라는 데는 의의가 있었다. 트라우마로 얻게 된 얼굴의 흉터 그리고 지팡이까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신체 접촉에 대한 과민 반응은... 뭐 다음 시리즈까지 이어 본다면 이해할 수도 있을 것도 같은데, 탐정 율리아 스타르크 시리즈를 굳이 또 찾아 읽진 않을 것 같다. 여기에 전남편에 대한 구질구질한 마음까지! 주인공에게 어느 정도 독특한 점이 있으면 흥미롭지만 너무 지나치면 지친다. 실제 인물도 아닌데, 추리 소설의 주인공 탐정인데 완벽할 것을 기대하면 안 될까? 종종 이렇게 진부한 게 좋을 때도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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