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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

씨너스: 죄인들
영화 / TV
인종차별에 대한 메시지만큼이나 강렬했던 음악…. 최고의 “음악 영화”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지혜가 추천한 대로 영화관에서 보길 너무너무 잘했다. 솔직히 영화 내용은 그럭저럭 괜찮다 정도였는데 음악이 진짜 너무 좋았다. 애지안이 어떻게 블루스를 잘 알겠느냐만은 그래도 기타의 선율과 새미의 목소리가 어우러지는 부분에서 터질 듯한 심장을 느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영화 속 스택이 그랬고, 영화를 보는 전 세계 사람들이 그랬을 것이다. 비록 영혼으로 느끼지는 못하지만 온 마음을 다해서 느끼고 싶은 그 음악, 블루스. 어느 날 뜬금없이 재즈를 향해 느낀 열렬한 사랑만큼이나 블루스를 사랑하게 될 것만 같았다. 영화의 배경은 짐 크로우 법이나 ‘백인 전용’, 농장 화폐나 목화와 같은 단서들에서도 쉽게 알 수 있듯이 비백인에 대한 백인들의 인종차별이 만연하던 시기였다. 여전히 소작농으로 목화를 따는 사람들과 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 사이에 다른 건 오로지 피부색이었던 시절. 그랬던 시절이라고 하기에는 여전히 만연한 인종차별과 그로부터 나아간 이슬람 혐오와 난민혐오까지 지금도 그 맥이 이어지고 있지만. 음악을 사랑하는 새미의 쌍둥이 사촌 형 스모크와 스택은 차별이 지금보다도 눈에 명백히 보이던 시절에 (그 방법은 명확히 나오진 않았지만) 큰돈을 들고 고향으로 돌아온 이들이었다. 만약 SINNERS라는 이 영화의 제목이 영화에서 죽임을 당한 이들, 검은 피부를 가진 이들을 의미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박해받은 죄? 핍박받은 죄? 백인들 손에 이끌려 북아메리카 땅에 정착한 죄? 그렇다면 심판을 내리는 것은 누구인가. 백인-뱀파이어들이 심판을 내리는 이였다면 흑인-인간들은 그 심판을 받는 이였을까? 왜, 감히 누가 누구를 심판하는가? 진짜 죄인들은 누구인가? 영화에서 인종차별만큼 강렬했던 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이었다. 어쩌면 나에게는 그게 더 강하게 와닿았던 것 같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은 상식적이지 않은, ‘고구마 먹은 것처럼 답답한’ 행동을 한다. 스모크는 스택이 죽었음을 알고도 시신을 바깥에 두지 못하고, 그레이스는 뱀파이어들을 불러들일 것을 알면서도 클럽 주크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한다. 스모크와 스택의 서로를 향한 사랑, 스모크와 애니, 스택과 메리의 사랑, 남편 보와 딸 리사를 향한 그레이스의 사랑, 새미를 향한 형들의 사랑, 함께하는 모든 이들을 향한 슬림의 사랑….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형제를 밀치고 가족 앞에서 차갑게 문 닫을 사람은 없다. 비이성적인 인물이 아니라 모두가 지나치게 현실적인 인물이었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스모크와 스택의 서로를 향한 깊고 진한 사랑은 심장이 얼얼할 정도였다. 스모크는 기어코 스택의 심장에 말뚝을 박을 수 없었고, 스택은 뱀파이어에게 영혼을 잠식당하고 스모크를 물 기회가 있었지만 물지 않았다. 스모크가 매를 맞던 스택을 대신해 아버지를 죽인 날 이후로 둘은 수없이 많은 고난을 겪었을 것이다.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지는 둘밖에 몰라도, 피로 이어진 두 사람을 더 단단하게 엮고 또 엮었을 것이 분명하다. 둘은 서로를 너무 사랑했고 너무 아꼈고 그래서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없었다. 그저 서로를 놓아주고 행운을 빌어줄 뿐. 하지만 내가 호감을 느낀 또 다른 인물은 주술사이자 스모크의 연인인 애니였다. 애니는 스모크를 위해 기도했고, 위기 상황에서 점을 쳐서 미래를 보았다. 뱀파이어를 없애는 방법을 아는 유일한 사람인 애니는 자신이 죽을 것을, 그리고 높은 확률로 스모크도 죽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렇게나 덤덤할 수 있었던 마음은 대체 어떤 걸까? 괴로운 일이 없는 세상에서 스모크와 아기와 함께 행복하기를 너무너무 바라고 또 바랐다. 다시 음악 얘기로 돌아와서, 새미 무어는 꿈꾸던 대로 음악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날 사랑하는 사촌들과 이웃들을 잃었지만 그럼에도 그날은 새미가 진정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밀고 나가기로 마음먹은 결정적인 날이 되었다. 그날 자동차에서, 기차역에서, 그리고 클럽 주크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하던, 해가 지기 전의 그날이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날이었다고 말하는 노인의 얼굴에는 여전히 순수하고 예쁜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보다 한참 더 나이를 먹은 동생을 바라보는 형의 얼굴에도. 이 부분 쓰면서 장면 떠올리다 또 울었네 아 이제는 맨 처음에 적었던 문장을 조금 정정해야겠다. 이 영화에서 인종차별에 대한 메시지만큼이나 음악만큼이나 강렬했던 것은 사랑이었다. 그날 그들에게 죄가 있었다면 정말로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한 것뿐이었을 거다. 서로를, 음악을, 그 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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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영화 / TV
어떤 사랑은 사랑인 줄도 모른다. 어떤 사랑은 우정처럼 보인다. 어떤 사랑은 다른 사랑보다 진할 수 있을까? 그럴 지도 모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는 두 번 추천을 받았다. 대학교 사회학 강의 시간에 교수님으로부터 한 번, 그리고 전 직장 동료 지현 님으로부터 한 번. 교수님은 <가족> 이야기를 몇 번이고 했고 지현 님은 <괴물> 이야기를 몇 번이고 했다. 그리고 얼마 전, 다 같이 만날 날을 정하자고 카톡을 하다가 지현 님이 이 영화의 배경이 된 동네에 2박 3일 동안 머물며 오로지 영화 <괴물>만을 위한 여행을 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심지어 그걸 브이로그처럼 만들어 기록했다는 것도. 누군갈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느낀 거지만 늘 지현 님의 열정이 부러웠다. 사랑하는 것에 대한 열정이. 극장에서 16번이나 보고 일본도 다녀온 지현 님을 떠올리며, 나는 영화가 끝나자마자 어떤 사랑은 다른 사랑보다 진할 수도 있겠다, 고 생각했다. 미나토와 요리는 초등학교 5학년이라고 했다. 영화는 처음엔 어른들의 시각에서 진행된다. 미나토의 엄마, 호리 선생님의 시각에서 보이는 초등학생 미나토를 둘러싼 상황은 가히 문제적이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지 않게, 어른들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본 결과 수많은 오해가 쌓이고 쌓이고 서로가 상처를 받는다. 그러나 영화 중반을 지나며 우리는 미나토와 요리, 특히 미나토의 시선에서 그들을 둘러싼 세상을 바라볼 기회를 부여받는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그러한 기회를 누구보다 먼저 가진 사람이 호리 선생님도 미나토의 엄마도 아닌 교장 선생님이었다는 점이다. 미나토와 함께 악기를 불며 말하지 못한 사실들을 토해내는 교장 선생님을 보며 내가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어른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영화 내내, 나는 색안경을 끼고 미나토를, 호리 선생님을, 교장 선생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다름이 아니라 내가 어른이기 때문이었다. 너무 많이 알고 너무 많이 겪은 탓이었다. 영화가 결말을 향해 달려갈수록 나는 부끄러워져만 갔다. 미나토와 요리를 찾으러 산사태가 일어난 산으로 함께 달려가는 미나토의 엄마, 그리고 호리 선생님을 보며 부럽기도 했다. 나는 관객으로 미나토와 요리를 바라본 결과 색안경을 벗어낼 수 있었지만 그들은 그렇게 직접 보지 않았음에도 어른의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최근 몇 년 이제는 정말 어른이 다 되었구나 하고 스스로 느끼던 순간이 꽤나 있었다. 언제나 어른이 되고 싶었던 것 같은데, 정작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큰 슬픔을 느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웬만한 일에는 무감각해지는 것이고 자꾸만 모른 척하고 싶은 것이며 순수한 마음을 잃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요리는 엉뚱한 성격으로 반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미나토는 교실에선 그를 방관하지만, 학교 밖에서 미나토와 요리는 가장 친한 친구이다. 친구… 친구라는 이름으로, 우정이라는 말로 모르고 떠나보낸 사랑이 얼마나 많을까? 일전에 트위터에서 본 어떤 사람의 글을 떠올리며 나는 안도했다. 그래도 미나토는 모르지 않았기 때문에. 다행이다. 버려진 기차 안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눈동자 속엔 요리가 말한 우주가 있었다. 그래서 미나토는 겁이 났을 것이다. 생물학적 반응이 온 것도 그렇지만 그때, 요리와 한참 눈을 마주쳤을 때 깨달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요리를 좋아한다, 고. 자신이 얼마나 요리를 좋아하는지 알아버려서 그게, 정말로 무서웠을 것이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마음이라는 확신이 당장 드는 사람은 없으니까. 결말에 대해서는 노코멘트 하고 싶다. 어떤 결말이라도 좋다. 둘이 달리는 곳이 이곳이든 아니든, 어쨌든 미나토와 요리는 행복하니까. 인간 뇌든 돼지의 뇌든 상관없다. 요리는 미나토가 있어서 행복했을 것이다. 미나토 역시 요리가 있어서 정말 정말 행복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의 끝을 ‘없음’으로 규정하고 오래오래 사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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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2025)
책
이희주 <최애의 아이>를 감명깊게 읽고 급하게 사놓은 것 치고는 꽤나 늦게 읽은 책. 오로지 <최애의 아이>만을 보고 구매했음에도 나는 7편의 이야기들을 욕심껏 그득그득 집어삼켰다. 소화제도 없이, 그냥 영원히 뱃속에 묻어두고 싶을 만큼 욕심나는 이야기들. 멀고도 가까운 나라 베트남에 물결치는 몸을 두고 내 혼은 대한민국으로 자꾸만 둥둥 떠갔다. <반의반의 반>은 오천만 원이라는, 제법 큰 액수의 돈이 사라진 것을 주된 사건으로 삼는다. 영실의 오천만 원은 윤미의 합의금이 되었다가 현진의 교환학생 자금이 되었다가 끝끝내는 영실의 실버타운 입주비도 되지 못한 채 미궁 속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좌절하는 것은 윤미와 현진뿐이며 영실은 요양 보호사 수경에 대한 애정으로 이를 받아들이고자 한다. 3대에 걸친 여자들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며 나는 영실의 편도 되었다가 윤미의 편도 되었다가 현진의 편도 되었다가 했다. 그런데 자꾸만 영실에게 마음이 갔다. 작가의 의도를 그대로 따른 것인지, 아니면 내가 유독 노년층에게 마음이 약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그랬다. 엄마로부터 원하는 만큼의 사랑을 받지 못한 윤미도 가여웠으나…. DEAN의 <반>을 따라부르며 읽은 이야기는 미적지근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아쉽기도 했으나 가끔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지, 라고 생각도 했다. <바우어의 정원>에 나오는 은화도 머리가 하얗게 눈이 내린 여성이다. 3년이라는 공백을 깨고자 오디션에 지원한 그는 오디션 합격보다도 더욱 값진, 정림이라는 후배와의 만남을 통해 또 다른 삶으로 나아갈 준비를 마친다. “그 말을 들으니…”로 시작하는, 두 여자가 차를 타고 가며 나누는 대화는 추운 겨울이라는 작품의 배경마저도 잊을 정도로 따뜻하고 든든했다. 7편의 이야기 중 가장 희망적으로 끝나는 작품이라 그런지 다 읽고 나서도 꽤나 여운이 남았다. 정림의 이야기를 훔칠 것을 제안한 연출가에게 어렵지 않게 거절 의사를 밝힐 은화를 상상하며 나는 ‘강보라’라는 작가에게도, 은화와 정림에게도 애정을 느꼈다. 서장원의 <리틀 프라이드>를 읽으면서는 사랑하는 친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처음 이야기를 듣던 때로부터 10년도 더 지난 지금, 그는 나에게 여전히 소중하고도 귀한 보물이다. 연락이 뜸해져도 언제나 애틋한 내 친구를 떠올리며 나는 얼마나 많은, 다른 친구들과 멀어졌는가. 트랜스젠더 이슈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내가 이상한가 싶다가도 어린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사랑해온 그를 떠올리면 그러지 않을 수는 없었을 거라고, 애써 합리화를 하게 된다. 너의 인생에도 오스틴이, 혜령이 있었겠지. 나는 너에게 어떤 사람일까?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의 주인공은 얼핏 보면 나와 닮은 점이 아주 많은 것 같았다. 그래서 조금 멀리 떨어져 바라보면서 그때 내 마음도 저랬을까? 하고 떠올려 보려고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물론 내가 일부러 떠올리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지나쳐온 많은 아이돌, 배우들을 떠올리며 그중 절반 조금 안 되게는 이제 어디 가서 함부로 좋아한다고 말하면 안 되는 사람임을 상기했다. 남자들은 왜 그럴까? 유독, ‘남자’ 연예인들은 왜 그럴까? 싶다가도 그만 제풀에 지쳐 생각하기를 멈춘다. 한땐 정말 좋아했고 응원했고 사랑했던 이가 사회적 물의를 빚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제일 먼저 느끼게 된 감정은 슬픔이었고 그다음은 부끄러움과 죄책감이었다. 분노는 항상 나중에 왔다. 쉽게 분노를 느낄 만큼의 사랑은 아니었으니까. 함부로 화내지도 못할 만큼 좋아했으니까. 그러나 결국에 나는 알량한 정의감으로 길티 플레져조차 느끼면 안 된다 생각하고 오로지 길티만을 느꼈다. 이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괴롭거나 힘들거나 할 정도로 좋아하는 이가 없다는 사실은 편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하다. 예전엔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상태만을 바랐었는데. 꼭 누군가를 좋아하면서 에너지와 위안을 얻어야 한다는 관성이, 스스로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요즘 들어 더욱 손쉽게 쓰이는 도파민이라는 게 정말로 나에겐 중요한 걸지도…. <원경>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신오를 비웃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돼지 뼈로 가득한 구덩이 속에 있는 자신을 알아채고 허망함을 느끼는 신오는 안쓰러웠다. 원경과 그의 이모, 보살님은 모두 구덩이 바깥에 있는데 자기 혼자만 구덩이 깊은 곳에서 저 위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의 절망감, 소외감. 신오는 전 애인 원경을 찾아 속죄함으로써 마음의 짐을 덜려고 했으나… 원경의 이름으로부터 ‘먼 곳’이라는 의미의 동음어를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다. 누구보다 가까웠다고 생각한 원경이 아주 먼 곳에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걸 신오 자신은 전혀 몰랐다는 진실에서 느끼는, ‘사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감정. 처음에는 신오가 일전에 읽은 다른 한국 단편 소설에서 읽은 지훈 같은 남자인 줄 알았다. 가까운 (줄 알았던) 여성에게 마음대로 기대를 해 놓고 그가 자기 기대와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너무 쉽게 분노하는 남자. 그러나 신오는 지훈과 달리 그로부터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신오에게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었고 이야기 이후의 이야기에서 그의 안녕을 바랄 수 있게 되었다. 이희주는 정말 매력적인 작가이다. 작가 소개에서 <성소년>이라는 책의 제목을 발견하자마자 웃음이 픽픽 났다. 예전에 <성소년>을 읽고 난 뒤에 나는 차마 무슨 생각을 어떻게 해야 할지 무슨 글을 써야 할지 몰라 버벅거렸던 기억이 난다. 이희주의 소설은 그런 마력이 있다. 읽는 내내 웃었다가 심각했다가 경악하다가 하지만 막상 다 읽고 난 후 내 생각을 정리하려고 하면 머릿속이 빽빽하다 못해 펑 터져 종내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 2022년에 <성소년>을 읽고 글을 쓸 때는 이게 졸린 상태에서 책을 덮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4년이 지난 지금 <최애의 아이>를 읽으면서는 그게 아님을 확신할 수 있다. 나는 누가 내 정리되지 않은 머릿속을 헤집어볼까 두려웠던 거다. 한 번도 아이를 갖고 싶다 욕망해본 적 없는 내가 우미에 나를 대입하고 유리에 누군가를 대입할까 말까 망설인 머릿속을, 언젠가 꿈에서 최애와 안정적인 가정을 꾸렸는지 둘째 계획을 진지하게 세우던 걸(첫째도 아니고 둘째인 게 진짜 웃기다) 내심 기억하는 머릿속을. 만약 우미와 같은 기회가 생긴다면 나는 최애의 정자로부터 ‘최애의 아이’라는 한정 커스텀 굿즈를 소유하고자 할 것인가? 죽었다 깨어나도 아닐 것이다. 늙어가는 최애의 모습까지도 사랑할 준비가 단단히 되어 있는 나에게 최애가 늙은 뒤에도 싱싱한 미소년일 최애와 나의 아이와 같은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다만 한 번씩 생각은 하겠지. ‘최애의 아이’를 낳는 팬들을 보며 무슨 기분일까 상상하고 궁금해는 하겠지. 그러나 그뿐일 거다. 그럼에도 나는 아이를 토마토로 만든 우미를 이해할 수 있다. 유리의 아이가 아니면 필요 없으니까. 우미에게 그건 앨범을 깠는데 유리가 아닌 다른 멤버의 포토 카드가 나온 것이나 다름 없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 같아도 그랬을 게 뻔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포토 카드가 나와서 쓰레기통에 처박듯이, 아이도. 여자를 씨받이나 임신 기계로 보는 남자들처럼, 우미도 나도 우리 모두 아이를 굿즈로 보면 가능한 일이다. 현호정의 소설은 얼마 전에 읽었던 고전 SF 소설 <솔라리스>를 떠올리게 했다. 부랑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나는 과거인지 미래인지 모를 지구의 탄생 혹은 붕괴를 상상했다. 만나라든가 아름다움이라든가, 성경에는 완전 문외한인 나에게는 그저 흥미로운 지구과학 이야기로만 와닿았으나 작가 노트와 해설을 보고 나서야 이게 창세기 얘기구나! 할 수 있었다. 작가 노트는 열심히 읽어도 해설은 매번 셀프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고 싶어 조금 등한시했는데, 약간 마음이 바뀌었다. 신형철 평론가가 ‘한 번 읽으면 현란하고 두 번 읽으면 심오하고 세 번 읽으면 쓸쓸하다.’라고 했는데 꼭 세 번을 읽고 싶어졌다. 단편집이 이렇게 전부 인상적인 글로만 채워지기는 쉽지 않음을 안다. ‘수상’ 작품집이라 그런가 싶어 올해의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 나오면 또 관심을 가질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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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렁이 울음소리
책
읽는 내내 사무치게 외로웠고 쓸쓸했다. <나목>의 경아처럼 죽고 싶다가도 살고 싶었고, 마치 내가 '나목'이 된 것처럼 음울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내가 겪어본 적 없는 전쟁, 그렇지만 내 핏속에 내 전의식에 꾹꾹 새겨진 전쟁. 나는 공부를 하기 위해 북에서 서울로 내려왔다던 할아버지를 떠올리다가, 대학을 나왔다는 이유로 군대에서 구타를 당한 후유증을 끝끝내 앓았다던 우리 할아버지를 떠올리기도 했다. 두 할머니도... 그들은 어떤 삶을 살다가 갔을까? 더 이상 물어볼 수도 없는 4명의 그 시절 사람들 얼굴을 찬찬히 더듬으며 나는 그리움을 느꼈다. 그렇지만 어릴 적만큼 격정적이진 않고, 단지 미미한 그런 그리움을. 사실 나는 그 유명한 <자전거 도둑>도 어릴 때 읽지 않았다. 책을 싫어했다던가, 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1층부터 5층까지 뺀질나게 도서관을 드나들었고 새 교과서를 받으면 제일 먼저 국어 책 속의 활자부터 주르르 읽어가던 난데. 그 시절 많은 아이들이 읽었던 <자전거 도둑>을 나는 아직까지 읽어보지도 않고 그 내용도 모른 채 살았다. 그래서 박완서는 내게 아득히도 먼 사람이었다. 좀 더 자라서 <엄마의 말뚝>이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도 읽어보지 않았다. 2011년 타계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렇구나, 대단한 사람이 죽었다구나, 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10년 뒤 나온 이 책을 나는, 또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 읽었다. 그리고 이제야 그의 죽음에 아쉬움을 느꼈다. 참 많이 뒤늦게도. <지렁이 울음소리>라는 제목이 가진 역설에 이끌렸다. 책 제목이 <지렁이 울음소리>인 것도, 이 책의 처음을 장식한 글이 <지렁이 울음소리>라는 단편인 것도 좋았다. 본디 지렁이는 울음소리가 없다. 있다고 해도 우린 듣지 못하는 소리일 것이다. 주파수가 다르다던가, 너무 작은 볼륨이라던가 하는 이유로. 각자 중년과 노년이 된 제자 숙이와 욕쟁이 선생 이태우는 각자의 삶에 지긋지긋한 권태를 느끼던 중 서로를 만난다. 다방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그들은 이태우 선생의 편지로 만남의 끝을 맺게 된다. 이태우는 과연 죽었을까? 죽음으로써 지렁이 울음소리라도 토해내려던 그의 시도가 성공했을까? 숙이도 언젠간 지렁이 울음소리를 뱉을 시도를 할 것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숙이는 그냥 주어진 삶을 오래도록 권태롭게 살아가며 이태우 선생을 종종 떠올릴 것이다. 나는 그런 결말에 은근히 위안을 받았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에서 박완서는 진정으로 부끄러워 해야 할 것에 대해 생각해보길 권한다. 정말로 부끄러워 해야 할 것은 두 번의 이혼과 세 번의 결혼을 겪은 것이 아니라, 천박하고 상스러운, 명예와 권력과 재물이라는 다채로운 색안경을 쓴 마음가짐이라고, 작가는 숨김없이 말한다. 이 글은 내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인 1976년에 나왔다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수학과 같은 지식을 가르치는 학원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가르치는 학원이 필요하다는 말은 무려 5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에도 적용되는 것이라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나의 부끄러움을, 부끄러움이라고는 모르는 사람들과 조금이라도 나눌 수 있다면! 내가 부끄러워하는 만큼이라도 그들이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아니, 아니면 어쩌면 내가 느끼는 부끄러움도 부족한 것일 지도 모른다. 이런 말이 오만한 것이라면, 나도 부끄러움을 가르치는 학원에 가야할 것일 지도.... <도둑맞은 가난>은 워낙 사람들 입방아에도 자주 오르내리고 해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실로 읽어보니 차라리 상훈에 가까운 처지인 나도 그에게 부아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어디 감히 가난까지 빼앗아 가려고, 정말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다 빼앗아 가려고 들어. 상훈과 그의 아버지라는 정말 역겨웠다. 나라도, 누구라도 세간살이를 다 던지며 내쫓았을 것이다. '나'는 어릴 적 상훈만큼은 아니어도 어느 정도 유복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전의 여유롭던 생활에서 밀려나 갑자기 가난에 내던져졌고, 이를 견디지 못한 어머니는 다른 가족들과 함께 죽어버리고 혼자가 되어 자기만의 가난한 삶을 꾸려나가던 참이었다. 그런 그의 앞에 나타난 어리숙한 상훈을 나름 같은 가난의 세계에서 '거두어' 줬는데 감히 갑자기 지금까지 일은 모두 나에게 체험이었고 유의미한 경험이었다고 말을 해? 자신의 삶이 누군가에게는 스쳐 지나가는 체험거리이고 동물원 우리 안의, 철창 안의 빤히 쳐다보게 되는 구경거리라고 하면 분개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종종 사람들은 노숙인이나 쪽방촌의 사람들, 쉼터나 보호소의 이들을 그런 식으로 바라본다. 심지어 성소수자들도 그런 대상이 된다(나는 아직까지도 자기에게 게이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하던 대학 동기를 기억한다). 멀찍이 서서, 유리를 가운데에 두고 그들의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함부로 유추하면서. 정작 본인들이 그 속에 갇히게 되면 견디지 못할 것은 전혀 알지 못하고. 가난뿐만이 아니라 모든 '불행'으로 여겨지는 '다름'을 철창 안에 가두어 두고 구경하는 건 징그러운 인간들의 가장 역겨운 악취미다. <나목>을 읽으며 나는 경아가 되었다. 이름이 외자라 경아, 경아 하다가 결국 경아라고 불리게 된 스물 스물하나 되던 그 여자. 죽고 싶다가 살고 싶다가, 사랑했다가 사랑하지 않았다가, 실컷 웃다가 문득 권태롭고 짜증을 부리게 되던 그 여자. 옥희도 씨와 이어질 수 없음에 울컥 자신을 사랑해준 남자와 결혼한 그 여자. 두 오빠가 포탄에 산산조각난 것을 보고도 어머니가 계집애만 살았다고 푸념하는 걸 듣고도 그 낡은 집에 끝끝내 살던, 그 집을 허물고도 은행나무만은 남겨놓자고 주장하던 그 여자.... 사실 내가 그 여자가 되었다기 보다는 내 지난 스물 스물하나를 그 여자의 스물 스물하나에서 보았다. 그러나 그 여자와 나 사이에는 6·25 전쟁이라는 너무나도 크고 절대로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나는 내 동생을 집안에 몰래 숨기지도, 동생의 몸이 피칠갑을 한 채 조각나 있는 것도 보지 않았다. 보지 못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사실 감히 내가 경아가 되었다, 라고 하기에 나의 인생은 너무나 순탄하고 보잘 것 없었다. 다방에서 태수를 마주하고 당차게 옥희도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던 어린 경아는 중년이 되어 중년이 된 태수와 함께 죽은 옥희도의 개인전에서 그의 쓸쓸한 나목을 마주하고 나온 뒤 참을 수 없어 나이 든 남편, 태수의 이마 주름에 입술을 묻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서로 사랑하던 경아와 옥희도가 함께 할 수 있었다고 해서, 옥희도가 그의 아내와 다섯 아이들을 두고 경아를 선택했다고 해서 둘이 행복해졌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중년의 경아도 그걸 알았고 알고 있었고 그래서 더욱 사무치게 남편이, 같이 늙어 온 태수가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늙어 죽을 때까지 경아는 태수와의 결혼이 최선이었을 거라고, 아니 어쩌면 구질구질하더라도 옥희도와의 사랑을 이어나가는 게 나았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한 치의 후회도 하지 않고 계속 살아갈 것이다. 다만 참을 수 없는 울컥함을 늘 그렇듯이 견디어 내면서. <카메라와 워커>는 영동 고속도로가 뚫리던 시절, 그러니까 70년대 초반 한국 사회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불안정함을 우울하게 조명한 글이었다. 그 시절, 장성한 조카를 걱정하던 고모는 6·25 전쟁을 겪은 세대였고 비뚜름하게 자라난 조카는 여전히 휘청이던 한국 사회의 칼바람을 온 몸으로 맞이하던 세대였다. 훈이가 번듯한, 즉 대기업에 다니고 '공일에는 카메라를 들고 아이들과 놀러 나가는' 그런 가장이 되지 못한 건 절대 고모의 탓도 할머니의 탓도 아니었다. 일찍이 죽은 그의 부모 탓도 아니었다. 고모가 조카를 키워내는 데 실패했다고 느낀 것도, 조카가 고모의 기대와 어렴풋한 자신의 기대와는 영 다른 삶을 살게 된 것도 모두 그 시절의 대한민국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모든 책임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있던 것은 아니어서, 그때 그 사람들은 어디에 무슨 말도 하지 못했다. 고모가 훈이를 다시 키운다 해도 자신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부처님 근처>를 읽으면서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묻힌 만불사를 생각했다. 만불산 올라가는 길에 주르르 놓여 있는 황금색 부처님 보살님을 떠올렸다. 어릴 땐 무섭기도 하고 경이롭기도 했던 그들을. 문득 한참 멀리 있는 그곳이 그리워져 빨리 운전 연습을 해서 나 혼자라도 차를 타고 다녀와야겠다는 충동적인 생각도 들었다. 나도 그곳에 다녀오면 마음이 편안해질까? 마지막 장면에서 ‘나’의 어깨에 기대 죽은 것보다도 고요히 잠든 어머니처럼 나도 편한 잠을 잘 수 있게 될까? 그렇진 않을 것이다. 나는 사상 때문에 죽은 아버지와 오빠도 없고 그들의 장례를 20년 넘게 지내지 않지도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그만큼의 숙원은 없고, 따라서 전쟁도 사상에 따른 죽음도 겪어보지 못한 나의 모든 얕은 불운은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사상이 ‘빨갱이’ 같다고 해서 총에 맞거나 고문당하지는 않을 것이고 그로 인해 죽지는 않을 것이다. 요즘 세상을 보면 꼭 그렇지 않을 것이라 단언하는 것도 웃기긴 한데... 어쨌든 나의 고만고만한 불행을 해소할 방법은 부처님께 빌고 제를 지내는 것으로 해소되진 않을 것 같다. 책을 야금야금 읽어가며 나는 내 슬픔도 우울도 책과 하나가 되는 것처럼 느꼈다.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도 묘한 여운을 느껴 한참이나 이 글을 붙들고 있었다. 문득 경아의 어머니가 끼던 틀니의 행방이 궁금해졌다. 정말로 버렸을까? 경아가 느꼈던 것과는 또 다른 쓸쓸함을 느꼈을 그가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절을 살아낸 사람들, 전쟁을 겪고 가족과 일상을 잃은 뒤 영원히 그 전과 같이 살진 못했을 사람들에게 짙은 연민과 슬픔을 느꼈다. 그러나 이제 내 주변에 그에 대해 물어볼 사람이 없음에, 이야기를 아픔을 나눌 사람이 없기에 나 역시도 음울하게 침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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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라리스
책
한참 전에 인터넷에 종종 떠도는 글이 있었다. 목성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에 대한 소설이었는데,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짧게 연재되며 많은 사람의 이목을 끌었다. 나는 그런 설정을 정말 낭만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단 한 번도 꼼꼼하게 읽어보진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자마자 그 글을 읽었더라면, 하고 조금 후회하게 되었다. 아마 이 책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을 것이지만 그래도 괜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생전 하레이는 켈빈에게 어떤 연인이었을까? 기바리안과 스나우트, 사르토리우스과 그들의 ‘손님’은 어떤 관계였을까? …만약에 내가 ‘손님’을 맞이하게 된다면 그건 누구일까? 모든 ‘손님’이 진실을 알게 된다면 하레이처럼 소멸을 희망하게 될까, 아니면 지구에서 살았던 ‘진짜’ 하레이처럼, ‘하레이’의 속성이랄 게 소멸인 걸까? 책은 끝끝내 그 어떤 물음에도 대답해주지 않는다. 솔라리스라는 행성과 바다의 정체도, 켈빈의 미래도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생각할 거리를 끝없이 주는 것 같다가도 아예 생각이라는 걸 시작도 못 하게 하는 막막한 책. 그런데도 전 세계 사람들이 사랑하는 이유를 알 것만 같다고, 그 모호함과 막막함 자체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 중 하나가 나인 것도 같다고, 그런 생각이 들면 자만일까? 사실 솔라리스 그리고 인간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내놓지 않는 것보다도 더욱 좋았던 건 인간에 대한 작가의 평가와 나의 평가가 일치하는 맥락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나는 언제나 사람들이, 인간들이, 아니 인류 전체가 지나치게 자의식과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때론 그에 분개하고 또 때론 한심함과 안타까움도 느끼면서 나 스스로도 인간이라 가질 수밖에 없는 인간중심의 사고를 떨쳐내고 싶었다. 작가는 솔라리스학의 연대를 제시하며 그 점을 아프도록 꼬집는다. 인간이 인간이기에, 인간 중심적으로 생각한 나머지 그 바깥의 관점은 생각도 하지 못하는 것. 인간 아닌 것을 인간처럼 여기고 이해하려고만 한 것. 이 저주와도 같은 모든 것은 사실 우주로 나아가기 한참 이전부터 같은 인간끼리도 서로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하지 않으려 한 것, 자신의 입장에서 타인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원죄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이는 인간이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족쇄이기에 나는 책 속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솔라리스는 영원히 베일에 싸인 행성으로 인류에게 존재할 것이라고, 그렇게 막연히 생각했다. 인간에게 죄가 있다면 내가 아닌 이(그것이 인간이든 아니든 간에)의 입장에서 생각하려 노력하지 않는 것, 벗어날 수 없는 ‘나’ 자신만의 입장에 순순히 무릎 꿇는 것이라고. 비단 우주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인간은 지나치게 오만하다. 아직 컴퓨터도 나오기 훨씬 이전에 이 책이 나왔을 때도, 지금도, 아주 오래된 과거와 아주 먼 미래에도. 그리고 우리는 이 오만함과 비대한 자의식의 벽을 영영 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숙명이고 운명이다. 하지만 운명에 순응할 필요가 있나? ‘우리’가 아닌 다른 많은 이들을 면밀하게 고려한다면, ‘우리’의 범위가 넓어질 지도 모른다. 혹시 몰라, 언젠가는 솔라리스도 ‘우리’가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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