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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
책
좋아하는 작가와 관심사가 겹친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것처럼, 그래서 작가를 좋아하냐 좋아했는데 우연히 그 작가와 관심사가 같냐 하는 느낌도 없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곽재식이라는 사람과 그가 풀어내는 이야기, 그 속에 담긴 함의를 진심으로 좋아한다. <한국 괴물 백과>를 읽을 때까지만 해도 그저 흥미로운 옛날 이야기를 많이 아는 사람이구나 했다. 평교가 주최한 온라인 북토크에서 그에게 질문했다가 받은 <곽재식의 미래를 파는 상점>을 읽을 때는 내 관심 분야에 대한 나의 견해와 그의 견해가 유사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이번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를 읽으면서는…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그건 그와 내가, 만난 적이라고는 온라인으로 딱 한 번 만난 게 다인(심지어 나만 그의 얼굴을 보고 그는 내 얼굴도 모른다) 우리가 꼭 겹치는 것 같은 느낌과도 같았다. 나의 낭만과 그의 낭만이 같은 방향성을 갖고 나의 문제의식과 그의 문제의식이 마주 보는 것과 같은 기분, 그 이상이었다. 그래서 나는 확신하게 되었다. 이 사람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구나, 하고. <달과 육백만 달러>는 얼결에 싱글대디가 된 남자가 다섯 살 딸에게 엄마를 찾아주는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이원이가 어쩌다 태어났고, 어쩌다 친엄마를 떠나 웬 국회의원 부부를 거쳤다가 주인공에게 오게 되었는지 걱정되었다. 그러나 주인공이 어린 이원이에게 맞추려고 고군분투하는 것이나, 전 애인이던 이원이의 친엄마를 찾아 딸과 함께 호주로 떠나는 걸 보면서는 갑자기 아빠가 된 것 치고 책임감 있게 행동하려 노력하는 주인공이 멋지게 느껴졌다. 반면 혼자 이원이를 낳았을 여자에 대해서는 가엾다고 느끼다가 점점 호감도가 떨어지고 있었는데, 마지막에 우주비행사로서 달에 간 것을 보고는 아! 하지만 텔레비전에 나오는 이원이 엄마를 보며 이원이 아빠가 사랑을 느끼는 걸 보며 왠지 엄마도 아빠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을 했다. <최악의 레이싱>은 책이 쓰인 2000년대 대학 캠퍼스와 그 시절의 풋사과 같은 사랑을 떠올려볼 수 있게 한 글이었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타지도 못하는 자전거를 태워주겠다고 하고, 또 그 말을 지키기 위해 일주일간 고군분투를 하는 남자. 사실 대학생이라고 하면 남자라고 하기에도 아직은 좀 어린 느낌이 (이제는) 드는데, 그래서 그런지 더 응원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온갖 친구와 선배, 심지어 교수님까지 끌어들인 자전거 대작전은 사실 그 모든 걸 알고 있던 앙큼하고도 사랑스러운 ‘그녀’가 톡 쏘는 고백을 함으로써 최종 성공으로 끝난다. 자신이 매일같이 자전거 타기 연습을 하며 넘어지고 또 넘어지던 것을 보고도 모른 척했다는 걸 안 주인공은 꽤나 부끄럽고 창피했겠지만, 이제는 여자친구가 된 그녀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그래서 더 좋아졌을 수도 있을걸? 나 같으면 그랬을 거다. 거짓말을 한 건 괘씸할 수 있지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랬다고 하면 제법 귀엽잖아. 누군가가 생각이 나서 더 킥킥거리며 읽었던 것 같다. <달팽이와 다슬기>는 앞의 두 이야기에 비해 너무 마음이 아픈 이야기였다. 이 글은 2007년에 쓰였고 책은 2013년에 나왔는데 지금이야 흔하다지만 당시에는 가시화조차 크게 되지 않았던 다문화가정에 대한 차별적 시선을 이렇게 담담하게 풀어내다니. 마침 2007년 당시 주인공과 동년배였던 나의 초등학생 시절을 떠올려보면 실제로 있었을 법도 한 일이라 더욱 울적했다. 그로부터 근 20여 년이 지난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도 여전히 다문화가정과 그 구성원을 향한 편견과 차별이 많이 남아있음을 생각하면 정말 우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왕>은 역시 2000년대의 어렴풋한 기억으로 풋풋하게 읽었던 것 같다. 비록 남산에 자물쇠를 채우진 않았지만 기념일에 근처 식당에서 자물쇠와 열쇠를 나눠가졌던 내 반쪽도 생각이 났다. 1년 전 대학 때문에 헤어진 여자친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벨기에 왕 앞에서 알지도 못하는 불어로 열심히 말을 하는 20살 남자애. 비록 커서 그 애와 결혼하진 않았더라도 여자친구 마음에는 평생 남을 소중한 기억일 것이다. 치기 어린 사랑은 완벽하지 않고 완성되지 않아서 그 자체로 좋다. 그래서 둘이 함께하지 않은 결말도 정말 좋았다.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는 낭만 치사량의, 정말 최고로 사랑스러운 중편 소설이었다. 백두산이 폭발해 비행기가 뜰 수 없게 되자 태평양 반대편으로 지구를 반 바퀴 넘게 돌아온 새신랑. 연이은 불운에도 어떻게든 방법을 모색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 남자. 미국에서 영국으로, 영국에서 터키, 몽골과 중국을 가로질러 북한까지 간 남자는 마지막 15km를 두 발로 달려 남한과 북한의 경계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여인에게 도착한다. 결혼식 한 시간 전에. 결혼식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남자는 깨닫는다. 결혼한다고 갑자기 세상이 달라지진 않을 거라고. 사랑하는 여자가 미워 보이는 날도 있을 것이고 함께 사는 게 호락호락하지 않을 날도 있을 거라고. 그럼에도 그 남자는 여자와의 결혼식을 위해, 여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시간 맞춰 한국으로 돌아갔다. 수많은 고난과 좌절에도 거리낌 없이, 주저함 없이. 여자가 방글라데시인이고 이슬람교도라고 반대하던 남자의 부모도 하물며 백두산 폭발도 그 무엇도 두 사람의 사랑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런 게 진짜 사랑인 것 같다. 처음 만난 순간처럼 뜨겁진 않더라도 그때 그 마음을 식지 않고 이어갈 수 있는 것. 이 글을 읽으며 나는 문득, 나도 결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7년이 넘게 내 곁에서 매일같이 있는 어떤 사람을 떠올리며. 괴물 이야기, 미래 이야기뿐만 아니라 사랑 이야기도 내 마음에 꼭 맞게 쓰는 사람, 곽재식. 트위터나 포스타입 계정을 보면 어쩐지 옆집 아저씨, 삼촌 같은 친근함도 느껴지는 작가, 곽재식. 곽재식이 낸 책들을 다 읽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지금처럼 차근차근 읽어나가면 언젠가는 그가 책을 내는 속도도 따라잡을 수 있지 않을까? 틈틈이 포스타입 글도 읽어야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낭만적인 이야기를 쓸 줄 아는 사람의 글은 단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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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톨스토이 문학전집 2)(반양장)
책
톨스토이가 이 작품으로 부활시킨 것은 네흘류도프와 카츄샤만이 아니었다. 그 시절 러시아와는 동떨어진,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나와 같은 사람도 이 책을 읽음으로써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일주일이 안 되는 시간 동안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네흘류도프와 카츄샤에 대한 나의 마음이, ‘범죄자’라고 불리는 이들과 모두가 우러러보는 명예와 권력을 가진 이들에 대한 나의 시선이 서서히 바뀌는 것을 느꼈다. 그중 가장 놀라웠던 것은 나의 분노와 증오도 사랑과 용서로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의 탄생이었다. 처음 나의 분노는 네흘류도프를 비롯한 남자들을 향했다. 카츄샤로 하여금 어려운 길을 걷게 만든 것은 네흘류도프와 다른 남자들이었다. 특히나 네흘류도프가 진심으로 그의 마음을, 몸을 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카츄샤는 타락(여전히 이 단어가 맞는진 모르겠지만)의 길을 걸었다. 그래서 괘씸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징역형을 기다리고 있는 카츄샤를 보고 나서야 자기 잘못을 깨닫다니. 그것도 자신은 떵떵거리며 배심원석에 앉아서. 당연히 카츄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카츄샤와 결혼하겠다는 다짐도 자의식과잉처럼 느껴졌다. 카츄샤의 지난날에 대한 보상으로 자신과의 결혼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으로 지난 세월과 그간 그가 받은 고통에 대한 보상이 완벽히 이루어지나? 그리고 카츄샤가 그걸 진정으로 원하는지 아닌지 어떻게 확신을 하나? 한참이나 고까운 눈으로 네흘류도프를 바라보았다. 변호사를 선임하고 이리저리 청원서를 쓰는 것이 카츄샤를 위한 척 시혜적으로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한 일로만 보였다. 그러나 네흘류도프는 카츄샤를 위해, 그리고 카츄샤와 함께 수감된 다른 이들을 위해 판사와 변호사 등 고위 관료들을 만나며 실제로 정말로 생각의 변화를 겪었다. 어느 순간 네흘류도프가 진심으로 변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사유재산, 특히나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그의 믿음으로부터 나온 행동-실제로 경작하는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는 것-을 보며 느꼈다. 물론 오랜 기간 사치스럽고 여유로운 생활을 해온 네흘류도프는 자신의 것이라 여기던 많은 것을 포기하는 게 정말 맞는 일인지 고민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면모가 오히려 네흘류도프가 ‘사람다운’ 사람임을 보여주는 지표처럼 여겨졌다. 카츄샤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맑은 그의 마음이 그의 깊은 곳에 살아 있으며, 다만 방탕하고 이기적인 생활 밑에 숨겨져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네흘류도프는 카츄샤를 위해 감옥의 안과 밖을 같은 시간 속에서 경험하며 사회의 부조리함을 깨닫는다. 그러한 깨달음이 가장 잘 드러난 부분은 배심원으로서의 둘째 날, 매트를 훔칠 수밖에 없던, 자신의 죄를 시인한 청년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였다. 230쪽에서 네흘류도프는 생각한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저 청년이 특별히 악한 사람이 아니라 가장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은 지극히 분명하다. 그리고 청년이 저런 사람이 된 것은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그런 사회적 환경에 놓였기 때문이다. 이런 청년이 사회에 생기지 않게 하려면 사람이 불행하게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사회적 환경을 먼저 없애는 것이 당연한 순리다. / 그런데 우리는 무얼 하고 있는가? 저런 청년과 같은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체포되지 않고 있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우연히 우리 손아귀에 들어온 저 청년만을 감옥에 처넣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게 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지극히 위험하고 의미 없는 일을 해야만 하는 환경으로 내몬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이와 같은 사회 구조의 병폐가 100년도 더 지난 한국에도 적용된다는 것에 통탄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렀음에도 다른 나라, 다른 사회에서 동일한 부조리가 발견된다면 이건 인간의 본성인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니 인간이 너무너무 미웠다. 증오스럽고 역겹기 짝이 없었다. 약하고 위기에 처한 사람들의 사정은 생각하지도 않고 무작정 손가락질하고 처벌하는 가장 보통의 사람들이 너무 끔찍했다. 231쪽에서 네흘류도프는 다시 생각한다. ‘만약 이런 사람들에게 주는 월급 중 단 100분의 1만이라도 사회에서 버림받은 존재들을 도와주는 데 돌리면 어떨까? 우리는 우리의 안전과 생활의 편리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노동과 용역을 제공하는 사람들로만 여기고 있는 이들을 도와주자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청년을….’ 작중 추후 카츄샤가 함께 지내게 된 정치범들 중 누군가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노동의 가치가 인정받아야 한다는 의견이 지지를 받는, 공평하고 평등한 세상을 위해 부유한 이가 그렇지 않은 이에게 나누는 것에 대한 언급이 금기시되지 않는 사회가 이 책의 배경이었던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오히려 10여 년 전보다도 이와 같은 생각이 억압받고 있는 걸 생각하면 참으로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 2025년에 ‘빨갱이’라는 단어가, 그것도 누군가를 조롱하고 낙인찍기 위해 사용되고 있을 수가 있지? 힘들게 삶을 영위하고 있는 타인을 위해 내가 가진 것을 나누자는 의견이 무슨 문제가 되지? ‘자유’라는 말에 지나치게 사로잡힌 이들이 자신의 자유를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 양 굴 때마다 지친다. 네흘류도프가 관리들, 판사와 검사, 변호사와 감옥 소장, 간수, 호송병들에게 느낀 역겨움을 나도 매일같이 느끼고 있었다. 다만 나는 권력보다도 인터넷에서 손가락을 놀리며 ‘자유로운’ 의견을 배설할 권리를 가진 이들 전반에 대한, 좀 더 폭넓은 혐오감에 심각하게 지친 상태였다. 네흘류도프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된 것은 이쯤부터였다. 257쪽의 서술은 꽤나 파격적이라 놀랐다. 글의 말미에 네흘류도프가 마태복음을 읽으며 그리스도를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고려했을 때 더욱 그랬다. 사실 이건 내가 종교 전반에, 특히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무지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감옥에서 죄수들을 모아 미사에 참석하게끔 하는 장면을 그리며 톨스토이는 말한다. ‘이 미사에 참석한 그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곳에서 이루어진 모든 일들이 사실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성 모독이며 조소를 퍼붓는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사제가 들고 들어와 사람들에게 입맞춤을 시킨, 끝에 칠보 구슬을 매달아 장식한 황금 도금의 십자가는 예수가 이곳에서 그의 이름으로 행해진 이 모든 일을 금지했다는 이유로 매달려 처형당한 처형대의 모양을 본뜬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굉장히 공감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당시 이런 서술이 이단적이라고 여겨지진 않았나 궁금했다. 러시아 정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적지만 당시 러시아의 많은 미사가 이처럼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을 때, 이는 미사를 진행하는 사제들 나아가 그들이 대변하는 종교, 러시아 정교의 전반적인 형식에 대한 도전이 아니었을까? 여기까지 쓰고 작가 연보를 보는데 아니나 다를까 1899년 장편 소설 <부활>을 발표하고 1901년 2월에 러시아 정교로부터 파문당했다고 적혀 있다. 아마 이 소설 덕분이었을 것 같다. 800여 쪽에 달하는 작가정신 출판의 <부활>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책의 3/4를 조금 넘긴 뒤에 나온다. 작열하는 7월, 이송을 위해 죄수들은 뙤약볕에서 몇 시간이고 걸어야 했다. 그 결과 가장 약한 이들 5명이 일사병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유형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감옥에서 나온지 하루도 되지 않아 비참하게 죽어버린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보고도 호송 장교, 간수장, 경찰, 경찰서장, 그리고 죄수들과 아주 먼 곳에서 이를 지시한 주지사까지 많은 이들이 아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그 무엇도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에 개탄하며 네흘류도프는 635쪽에서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비록 한 시간만이라도 그리고 아주 예외적인 어떤 한 경우에 국한된다고 할지라도 인간을 사랑하는 감정이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그러면 범죄가 없을 텐데.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죄를 짓고도 자기는 죄가 없다고 여기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을 텐데.’ 이미 여기서 네흘류도프는 부활을 예고하고 있었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사랑! 다른 이를 가엾게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하다면 범죄에 대한 선고도, 범죄도 없을 것이다. 심판받을 이도 심판할 이와 동등한 인간임을 안다면, 그러므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심판할 권리가 없음을 깨닫는다면! 어째서 누군가는 남들보다 돈이, 땅이 많다는 이유로 그들 위에 군림하는가? 돈과 땅이 있으면 권력이, 또 권력이 있으면 돈과 땅이 생긴다는 걸 아는 사람들은 욕심내는 것을 멈추지 못하고 더욱 긁어모으려고 한다. 그럴수록 가진 이는 더 갖게 되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더 가난해진다. 그리고 가진 이의 그렇지 못한 이에 대한 착취도 점점 더 당연한 것이 된다. 이게 다 욕심 때문이다. 그렇다면 욕심을 내지 못하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소유할 수 없게, 토지라든가 하는 것을 소유할 수 없게 한다면… 그 무엇을 한계 짓지도 그 무엇으로부터 한정 받지도 않는 그 노인처럼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쓰고 보니 아직 나는 분노 대신 사랑을, 증오 대신 용서를 실천할 준비가 안 된 것도 같다. 깨달음과 행동하는 것은 역시 많이 다르구나. 반성 또 반성. 비록 네흘류도프는 카츄샤와의 결혼이라는 맨 처음의 목표를 이루진 못했다. 카츄샤 역시 네흘류도프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음에도 그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시몬손을 택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라는 타인을 위한 변화가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변화를 겪었다. 그리고 부활했다.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네흘류도프는 카츄샤와 결혼하지 못했으나 좌절하지 않았다. 대신 카츄샤와의 재회, 그리고 그 이후로 겪고 깨달은 모든 것으로부터 더 많은 사람을, 가장 인간다운 인간들을 위하고 사랑할 미래를 향해 나아가며 이야기가 끝이 난다. 책은 여기서 끝났지만 네흘류도프의 삶은 이제 다시 시작이라는 것을 안다. 카츄샤도 그렇다. 그리고 나도, 이 책을 통해 부활을 겪은 나 역시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준비가 된 것 같다. 사랑으로 가득한 새로운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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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호의 악몽 2
책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으면서 다 읽은 책은 진짜 오랜만이다. 아니 처음인가? 오늘까지 반납이어서 그랬던 것도 있지만 탐험대가 테러 호를 떠나 킹윌리엄 섬에서 행군하다가 흩어진 부분부터는 진짜 정신을 못 차리고 읽었다. 크로지어가 벙어리 여자를 만난 이후부터는 실제로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여자가 툰바크와 치룬 것과 같은 의식을 치룬 뒤 탈리릭투그는 여자의 남편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어릴 적 메모 모이라 할머니와의 기억에서 늘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흰 옷을 입은 사제가 아닌 하얀 털로 뒤덮인 툰바크에게 자신을 바치는 장면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떠내려온 테러 호에 깃든 악한 이누아를 알고 미련 없이 배에 불을 지른 장면도 좋았다. 크루지어로 살아온 삶은 가슴에 넣어두고, 탈리릭투그로 또 다른 삶을 살아갈 준비가 된 것 같아서. 2권 후반부에 나오는 세드나는 이누이트 족에서 가장 유명한 신이다. 이전에 읽은 책에서 천문학자가 자신이 발견한 별에 세드나의 이름을 붙였기에 나도 대강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자른 세드나의 손가락에서 고래와 바다표범, 바다코끼리가 탄생했다. 그리고 세드나는 바다의 영혼이 되었다. 새로이 알게 된, 그리고 이 책 전반과 관련이 있는 이누이트 설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세드나가 만든 툰바크는 그의 통제를 벗어났다. ‘진짜 사람들’ 이누이트의 주술사들은 최고의 남녀 주술사들로부터 ‘시샴 이에우아’를 탄생시켜 툰바크와 소통하게 했다. 이리버스와 테러 호의 선원들이 벙어리 여자라고 부른 실나는 시샴 이에우아였다. 괴물 툰바크와 소통했고, 크로지어가 천리안을 가진 것을 알았다. 그리고 언젠가 같은 시샴 이에우아가 될 것을 알았다. 크로지어가 탈리릭투그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은 운명이었다. 그 운명을 알고 있던 것은 실나뿐이었지만. 실나가 말 대신 생각으로 전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해 크로지어는 그렇게 먼 길을 돌아왔던 것이다. 크로지어도 실제 인물이었다. 실제로 두 배가 실종된 지 거의 10년 뒤 이누이트 마을에서 그가 목격되었다고 했다. 이 책은 존 프랭클린보다 그에게 초점을 맞추어 쓰였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알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나는 정말 크로지어가 탈리릭투그든 다른 무엇이 되었든 이누이트 마을에서 고통 없이 지내다가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정말 재미있게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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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의 딸(하)
책
중국 근현대사에 관심을 갖게 된 20대 초 이후, 나는 중국이라는 나라와 중국 사람들, 그리고 공산주의와 공산당에 대해 편협한 시각을 갖지 않으려 무진장 노력을 해왔다. 그때는 지금처럼 한국 내 중국에 대한 혐오가 만연해지기 전이었기에 그러한 나의 노력은 큰 방해를 받지 않았다. 물론 언론에서는 조선족과 중국인에 의한 범죄가 과장되어 보도되는 경향이 있었으나, 다행스럽게도 그런 내용을 얼추 걸러 들을 수 있는 수준이었기에 내게 큰 영향을 주진 못했다. 내가 중국 근현대사에 관심을 보이게 된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은 <백 사람의 십 년>이라는 책이었다. 대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그 책은 내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백 사람의 십 년>은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중국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들을 수집한 것인데, 그동안 중국 내 수많은 사람이 명예를 잃고 가족을 잃었으며 생명까지 잃었다고 했다. 그것도 다른 외부 요인이 아니라 자신의 국가에 의해서. 너무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았으며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인간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어리석을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나름의 편견을 내려놓았다고 여겼는데, 이는 내가 가져온 중국에 대한 선입견이 ‘선입견’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그 뒤로도 나는 꾸준히 중국에 관심을 가졌다. 막 학기에는 중국과 북한 사람들, 재일교포에 대한 강의도 수강해 열심히 들었다. 코로나 시대를 지나며 나날이 중국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반감은 심해져만 갔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은 혐오 발언과 행위도 있었다. 그럴수록 중국에 대한 나의 마음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그리고 더욱 궁금해졌다. 한국에서 현대 중국이 가진 이미지는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 이웃 나라인 중국에 대해 우리가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이고,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은 무얼까? 나는 내가 제일 잘하는 것, 책을 읽음으로써 이를 해소하고자 했다. 올해 읽은 중국에 관한 책으로써는 세 권째에 해당하는 <대륙의 딸>. 이전에 읽은 두 권은 중국 역사와 철학에 대한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실제 중국에서의 삶을 기록한 자전적인 이야기책이었다. 심지어 청 말기부터 살아온 외할머니부터 어머니, 자신까지 3대에 걸쳐 이어지는 중국 여성들의 인생에 대한 일종의 회고록이었다. 상권에서 외할머니와 젊은 어머니의 삶을 다루었다면 이번 하권에서는 어머니와 젊은 글쓴이의 삶이 다루어졌다. 하권에서는 내가 중국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한 ‘문화대혁명’ 시절에 대한 글쓴이 가족의 기억이 담겨있었다. 공산당에 모든 삶을 바친 어머니와 아버지가 구금당하고, 폭력과 고문에 시달리고, 심지어 강제노동 수용소에 들어갔을 때는 마치 내 부모가 그런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마음이 찢어졌다. 가족들이 갈래갈래 떨어져 사는 시절에 대한 기록도, 외할머니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담담한 서술도 정말 내가 겪은 일처럼 숨도 못 쉬게 슬펐다. 한편 슬픔과 괴로움 속에서도 아름다움과 위안을 찾던 소녀 시절의 글쓴이에게는 연민을 느꼈고, 마오쩌둥 사후 중국에 자유의 바람이 불었을 때 글쓴이가 대학에 가고 하고 싶던 공부를 하는 부분을 읽으며 뛸 것처럼 기뻤다. 그밖에도 나는 글쓴이의 크고 작은 즐거움과 슬픔, 외로움을 함께 나누었다. 두 권으로 쪼개진 책을 읽는 내내 내가 글쓴이였고 글쓴이가 나였으며, 글쓴이의 부모를 내 부모처럼 공경하고 사랑했다. 이 책도 <백 사람의 십 년>처럼 중국 근현대의 어두운 면을 낱낱이 파헤쳤다. 공산당이 최초에 만인의 평등이라는 위대한 가치로 시작한 것은 맞지만 국민당이 그랬듯이, 또 모든 사상이 그렇듯이 점점 본래의 거룩한 목표는 희석되고 권력에 대한 야욕만 남았다. 마오쩌둥과 그의 부인 장칭을 비롯한 4인방은 자신들의 지위를 위해 중국의 인민들을 잔인하게 학대했고, 그것도 모자라 그들의 도덕성과 지성마저 상실케 했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우울하다고도 할 수 있는 지점을 살아가면서 글쓴이와 가족들, 그리고 수많은 중국 인민들이 겪었을 마음에 미약하게나마 공감하는 것은 괴로운 경험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런 상황 속에도 가족을 위하고 아끼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은 변치 않을 수 있음을 발견한 것은 참으로 소중한 경험이었다. 책을 읽는 것은 늘 즐거운 일이다. 내가 이런 책을 알아내고 열렬히 읽을 수 있어서 정말로 다행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을 수많은 독자에게, 나에게 기꺼이 내어준 글쓴이에게 진심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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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토피아 2
영화 / TV
내가 이걸 보려고 20대를 살아냈구나…. 10년을 기다린 게 아깝지 않을 정도로 너무너무 좋았다. 주디 홉스와 니콜라스 와일드가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상대임을 닉도 알고 주디도 알고 우리 관객들도 알게 해준 2편 정말 감동 그 자체였다. 사랑이 뭘까? 고개를 들어 닉주디를 보게 하라…. 1편에서는 사랑일 듯 우정일 듯 긴가민가한 닉과 주디의 관계가 차곡차곡 쌓여갔다면 이번 2편에서는 둘의 관계가 단순 우정은 아님을 보여주는 데 큰 의의가 있었다. 허니문 산장으로 올라가는 길부터 본격적으로 둘의 관계가 우정 이상임이 드러나는데, 주디가 선물로 준 볼펜을 실수로 떨어뜨려 박살이 나자 둘의 관계에도 균열이 생겼다. 주디는 속상해서 아무 말도 안 하고 계속 암벽을 타고 올라가기만 했고 닉도 그랬다. 그런데 그런 닉의 침묵이 단순히 미안함에서 오는 게 아닌 게 보여서 나는 너무 심란했다…. 그런데 산장에서 서로 마음 터놓고 이야기도 못 하고 헤어지게 되어서 정말 머리를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전개상 엔딩에서는 둘 다 살아서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파트너라고 얘기하겠지! 그렇지만 둘은 그걸 몰랐을 거고 주디는 닉이 잡혀갔을 줄만 알았을 거고 닉은 주디의 생사도 모르고 걱정했을 거고… 정신병이 온다는 너무 수동적이다. 내가 정신병에게로 간다(당사자성 발언). 그렇게 아무 말도 못 하고 산장에서 헤어진 이후 한참이 지나서야 둘은 솔직한 마음을 말할 수 있었다. 닉이 해독펜을 던져 주디를 살리고 주디가 떨어지는 닉의 손을 잡아서 살린 이후에. 서로 생사도 확인하지 못하고 떨어져 있는 동안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 모든 일이 다 끝나고 닉도 주디도 횡설수설하면서 그제야 진짜 자기 마음을, 네가 내겐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고백하는데 어떻게 눈물이 안 나냐고…. 닉주디 관계성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이면 엉 하고 울어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상영관에서 나만 울었다고 하지? 진짜 아 도저히 안 되겠다 둘이 빨리 결혼해라 애초에 둘이 서로 상처 주고 상처받은 이유가 너무 다른 둘이 서로를 너무 아끼고 사랑해서라는 게… 벅차기도 하고 이해가 가기도 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해내고야 마는 정의로운 주디와 되도록 쉽게 살고 싶은 닉이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갈등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1편 볼 때는 주디의 시선으로 닉을 봤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자꾸만 닉의 시선에서 주디를 보게 되었다. 어른이 된 걸까? 나이가 들면서 점점 주디보다는 닉에 가까워지는 내가 아쉬웠다. 그렇지만 닉이 주디를 보는 것처럼 나도 조금 어렸던 나를 되돌아볼 순 있었다. 다만 닉은 주디가 행여나 다칠까 걱정했고 나는 20대 초반의 나를 보며 좀 안타까운 것도 같다고 생각했다. 게리의 가족은 뱀이라는 이유로 당연하다는 듯이 누명을 썼고 너무 쉽게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나아가서는 모든 파충류가 포유류를 비롯한 동물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게 되었다. 동물들의 유토피아를 자처하는 주토피아가 “모든” 동물을 위한 곳은 아니었다는 게 인간들이 살아가는 사회랑 다를 바가 없어서 화가 났다.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와 자유를 준다고 믿는 현대의 체제가 정말로 공정과 평등을 보장하고 있나? 이제는 아닌 척하지도 않고 경쟁을 부추기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먼저 배척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은 자명하지 않나? 그리고 그들이 누구인지도. 마침내 기후 장벽을 만든 것이 게리의 할머니임이 밝혀지고, 원래 그들이 살던 곳으로 돌아왔을 때 뱀들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그 긴 세월을 버티고 견뎌 왔음에도 모두 주디를 안아주고 싶어 해서 또 한 번 울컥했던 것 같다. 링슬리 가족을 보면서는 괜히 팔레스타인 생각이 났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링슬리 가족처럼 귀여운 고양잇과(찾아보니 캐나다? 스라소니란다)도 아니면서 왜 난리지… 너네 뭐 되냐고. 링슬리 가족 중 유일한 순딩이 포버트를 보면서는 참 마음이 안 좋았다. 게리를 배신한 것도 이해가 가고… 게리도 왠지 이해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가족의 인정과 사랑은 누구든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거니까. 그냥 불쌍하고 안타까웠다. 그래도 안 죽고 차라리 감옥에 가서 다행이었다. 마지막에 아버지한테 파트너십에 관한 책 보여주는데 짠하고 귀엽고. 살모사 게리가 눈밭의 추위에 다 죽어가면서도 주디에게 우리는 성공할 거라고 계속 그럴 때… 처음에는 무슨 소리야! 지금 너 다 죽어가잖아ㅠㅠ 싶었는데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냥 그런 믿음 자체가 너무 눈물이 났다. 얼마나 복잡한 마음이었을까…. 내가 게리에게 Permission to hug 받아서 꼬오오오옥 안아주고 싶다…. 주토피아 최고의 디바 가젤 언니 사랑해요 3편 무조건 나올 것이고 이스터에그처럼 숨겨둔 쪽지에서 확인할 수 있던 것처럼 그리고 쿠키에서 깃털이 떨어진 것에서 알 수 있었던 것처럼 새들이 나올 텐데 과연 또 어떤 이야기를 풀어갈지 기대가 된다. 동물들로 우리 인간 사회의 문제점을 꼬집고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작품은 언제나 사랑스럽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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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드
영화 / TV
아름다운 우정.. 아름다운 노래... 아름다운 여자들까지 삼박자가 완벽한 영화 사실 defying gravity가 위키드 넘버인 건 얼마 전에 알았는데 너무너무 엘파바를 위한 노래였다고 느꼈다!! 미드 glee에서도 학교에서 소외된 아이들이 부른 노래였는데 엘파바가 부르는 걸 보고 정말 깊은 울림을 받았음,, 신시아 에리보의 목소리가 너무 아름다웠고 아리아나 그란데와 합도 잘맞았당 엘파바는 사람들의 눈총이 아닌 사랑을 받고 싶었음에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다 내던질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캐릭터였다 그래서 엘파바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음! 글린다는 정말 통통 튀고 사랑스럽고 깜찍한 캐릭터였는데 아리아나 그란데가 정말 잘 소화해냈다 둘의 우정이 정말정말 아름다웠고 나도 친구들에게 때론 엘파바로 때론 글린다로 곁에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ㅠㅠ 내년에 파트 2 개봉한다는데 빨리 부탁드림다 + 25/01/04 곱씹을수록 최고의 영화.. Defying gravity 한곡재생하다가 5점으로 바꿨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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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너스: 죄인들
영화 / TV
인종차별에 대한 메시지만큼이나 강렬했던 음악…. 최고의 “음악 영화”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지혜가 추천한 대로 영화관에서 보길 너무너무 잘했다. 솔직히 영화 내용은 그럭저럭 괜찮다 정도였는데 음악이 진짜 너무 좋았다. 애지안이 어떻게 블루스를 잘 알겠느냐만은 그래도 기타의 선율과 새미의 목소리가 어우러지는 부분에서 터질 듯한 심장을 느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영화 속 스택이 그랬고, 영화를 보는 전 세계 사람들이 그랬을 것이다. 비록 영혼으로 느끼지는 못하지만 온 마음을 다해서 느끼고 싶은 그 음악, 블루스. 어느 날 뜬금없이 재즈를 향해 느낀 열렬한 사랑만큼이나 블루스를 사랑하게 될 것만 같았다. 영화의 배경은 짐 크로우 법이나 ‘백인 전용’, 농장 화폐나 목화와 같은 단서들에서도 쉽게 알 수 있듯이 비백인에 대한 백인들의 인종차별이 만연하던 시기였다. 여전히 소작농으로 목화를 따는 사람들과 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 사이에 다른 건 오로지 피부색이었던 시절. 그랬던 시절이라고 하기에는 여전히 만연한 인종차별과 그로부터 나아간 이슬람 혐오와 난민혐오까지 지금도 그 맥이 이어지고 있지만. 음악을 사랑하는 새미의 쌍둥이 사촌 형 스모크와 스택은 차별이 지금보다도 눈에 명백히 보이던 시절에 (그 방법은 명확히 나오진 않았지만) 큰돈을 들고 고향으로 돌아온 이들이었다. 만약 SINNERS라는 이 영화의 제목이 영화에서 죽임을 당한 이들, 검은 피부를 가진 이들을 의미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박해받은 죄? 핍박받은 죄? 백인들 손에 이끌려 북아메리카 땅에 정착한 죄? 그렇다면 심판을 내리는 것은 누구인가. 백인-뱀파이어들이 심판을 내리는 이였다면 흑인-인간들은 그 심판을 받는 이였을까? 왜, 감히 누가 누구를 심판하는가? 진짜 죄인들은 누구인가? 영화에서 인종차별만큼 강렬했던 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이었다. 어쩌면 나에게는 그게 더 강하게 와닿았던 것 같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은 상식적이지 않은, ‘고구마 먹은 것처럼 답답한’ 행동을 한다. 스모크는 스택이 죽었음을 알고도 시신을 바깥에 두지 못하고, 그레이스는 뱀파이어들을 불러들일 것을 알면서도 클럽 주크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한다. 스모크와 스택의 서로를 향한 사랑, 스모크와 애니, 스택과 메리의 사랑, 남편 보와 딸 리사를 향한 그레이스의 사랑, 새미를 향한 형들의 사랑, 함께하는 모든 이들을 향한 슬림의 사랑….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형제를 밀치고 가족 앞에서 차갑게 문 닫을 사람은 없다. 비이성적인 인물이 아니라 모두가 지나치게 현실적인 인물이었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스모크와 스택의 서로를 향한 깊고 진한 사랑은 심장이 얼얼할 정도였다. 스모크는 기어코 스택의 심장에 말뚝을 박을 수 없었고, 스택은 뱀파이어에게 영혼을 잠식당하고 스모크를 물 기회가 있었지만 물지 않았다. 스모크가 매를 맞던 스택을 대신해 아버지를 죽인 날 이후로 둘은 수없이 많은 고난을 겪었을 것이다.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지는 둘밖에 몰라도, 피로 이어진 두 사람을 더 단단하게 엮고 또 엮었을 것이 분명하다. 둘은 서로를 너무 사랑했고 너무 아꼈고 그래서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없었다. 그저 서로를 놓아주고 행운을 빌어줄 뿐. 하지만 내가 호감을 느낀 또 다른 인물은 주술사이자 스모크의 연인인 애니였다. 애니는 스모크를 위해 기도했고, 위기 상황에서 점을 쳐서 미래를 보았다. 뱀파이어를 없애는 방법을 아는 유일한 사람인 애니는 자신이 죽을 것을, 그리고 높은 확률로 스모크도 죽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렇게나 덤덤할 수 있었던 마음은 대체 어떤 걸까? 괴로운 일이 없는 세상에서 스모크와 아기와 함께 행복하기를 너무너무 바라고 또 바랐다. 다시 음악 얘기로 돌아와서, 새미 무어는 꿈꾸던 대로 음악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날 사랑하는 사촌들과 이웃들을 잃었지만 그럼에도 그날은 새미가 진정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밀고 나가기로 마음먹은 결정적인 날이 되었다. 그날 자동차에서, 기차역에서, 그리고 클럽 주크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하던, 해가 지기 전의 그날이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날이었다고 말하는 노인의 얼굴에는 여전히 순수하고 예쁜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보다 한참 더 나이를 먹은 동생을 바라보는 형의 얼굴에도. 이 부분 쓰면서 장면 떠올리다 또 울었네 아 이제는 맨 처음에 적었던 문장을 조금 정정해야겠다. 이 영화에서 인종차별에 대한 메시지만큼이나 음악만큼이나 강렬했던 것은 사랑이었다. 그날 그들에게 죄가 있었다면 정말로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한 것뿐이었을 거다. 서로를, 음악을, 그 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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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영화 / TV
어떤 사랑은 사랑인 줄도 모른다. 어떤 사랑은 우정처럼 보인다. 어떤 사랑은 다른 사랑보다 진할 수 있을까? 그럴 지도 모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는 두 번 추천을 받았다. 대학교 사회학 강의 시간에 교수님으로부터 한 번, 그리고 전 직장 동료 지현 님으로부터 한 번. 교수님은 <가족> 이야기를 몇 번이고 했고 지현 님은 <괴물> 이야기를 몇 번이고 했다. 그리고 얼마 전, 다 같이 만날 날을 정하자고 카톡을 하다가 지현 님이 이 영화의 배경이 된 동네에 2박 3일 동안 머물며 오로지 영화 <괴물>만을 위한 여행을 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심지어 그걸 브이로그처럼 만들어 기록했다는 것도. 누군갈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느낀 거지만 늘 지현 님의 열정이 부러웠다. 사랑하는 것에 대한 열정이. 극장에서 16번이나 보고 일본도 다녀온 지현 님을 떠올리며, 나는 영화가 끝나자마자 어떤 사랑은 다른 사랑보다 진할 수도 있겠다, 고 생각했다. 미나토와 요리는 초등학교 5학년이라고 했다. 영화는 처음엔 어른들의 시각에서 진행된다. 미나토의 엄마, 호리 선생님의 시각에서 보이는 초등학생 미나토를 둘러싼 상황은 가히 문제적이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지 않게, 어른들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본 결과 수많은 오해가 쌓이고 쌓이고 서로가 상처를 받는다. 그러나 영화 중반을 지나며 우리는 미나토와 요리, 특히 미나토의 시선에서 그들을 둘러싼 세상을 바라볼 기회를 부여받는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그러한 기회를 누구보다 먼저 가진 사람이 호리 선생님도 미나토의 엄마도 아닌 교장 선생님이었다는 점이다. 미나토와 함께 악기를 불며 말하지 못한 사실들을 토해내는 교장 선생님을 보며 내가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어른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영화 내내, 나는 색안경을 끼고 미나토를, 호리 선생님을, 교장 선생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다름이 아니라 내가 어른이기 때문이었다. 너무 많이 알고 너무 많이 겪은 탓이었다. 영화가 결말을 향해 달려갈수록 나는 부끄러워져만 갔다. 미나토와 요리를 찾으러 산사태가 일어난 산으로 함께 달려가는 미나토의 엄마, 그리고 호리 선생님을 보며 부럽기도 했다. 나는 관객으로 미나토와 요리를 바라본 결과 색안경을 벗어낼 수 있었지만 그들은 그렇게 직접 보지 않았음에도 어른의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최근 몇 년 이제는 정말 어른이 다 되었구나 하고 스스로 느끼던 순간이 꽤나 있었다. 언제나 어른이 되고 싶었던 것 같은데, 정작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큰 슬픔을 느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웬만한 일에는 무감각해지는 것이고 자꾸만 모른 척하고 싶은 것이며 순수한 마음을 잃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요리는 엉뚱한 성격으로 반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미나토는 교실에선 그를 방관하지만, 학교 밖에서 미나토와 요리는 가장 친한 친구이다. 친구… 친구라는 이름으로, 우정이라는 말로 모르고 떠나보낸 사랑이 얼마나 많을까? 일전에 트위터에서 본 어떤 사람의 글을 떠올리며 나는 안도했다. 그래도 미나토는 모르지 않았기 때문에. 다행이다. 버려진 기차 안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눈동자 속엔 요리가 말한 우주가 있었다. 그래서 미나토는 겁이 났을 것이다. 생물학적 반응이 온 것도 그렇지만 그때, 요리와 한참 눈을 마주쳤을 때 깨달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요리를 좋아한다, 고. 자신이 얼마나 요리를 좋아하는지 알아버려서 그게, 정말로 무서웠을 것이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마음이라는 확신이 당장 드는 사람은 없으니까. 결말에 대해서는 노코멘트 하고 싶다. 어떤 결말이라도 좋다. 둘이 달리는 곳이 이곳이든 아니든, 어쨌든 미나토와 요리는 행복하니까. 인간 뇌든 돼지의 뇌든 상관없다. 요리는 미나토가 있어서 행복했을 것이다. 미나토 역시 요리가 있어서 정말 정말 행복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의 끝을 ‘없음’으로 규정하고 오래오래 사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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