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롱이's
점수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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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
책
좋아하는 작가와 관심사가 겹친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것처럼, 그래서 작가를 좋아하냐 좋아했는데 우연히 그 작가와 관심사가 같냐 하는 느낌도 없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곽재식이라는 사람과 그가 풀어내는 이야기, 그 속에 담긴 함의를 진심으로 좋아한다. <한국 괴물 백과>를 읽을 때까지만 해도 그저 흥미로운 옛날 이야기를 많이 아는 사람이구나 했다. 평교가 주최한 온라인 북토크에서 그에게 질문했다가 받은 <곽재식의 미래를 파는 상점>을 읽을 때는 내 관심 분야에 대한 나의 견해와 그의 견해가 유사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이번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를 읽으면서는…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그건 그와 내가, 만난 적이라고는 온라인으로 딱 한 번 만난 게 다인(심지어 나만 그의 얼굴을 보고 그는 내 얼굴도 모른다) 우리가 꼭 겹치는 것 같은 느낌과도 같았다. 나의 낭만과 그의 낭만이 같은 방향성을 갖고 나의 문제의식과 그의 문제의식이 마주 보는 것과 같은 기분, 그 이상이었다. 그래서 나는 확신하게 되었다. 이 사람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구나, 하고. <달과 육백만 달러>는 얼결에 싱글대디가 된 남자가 다섯 살 딸에게 엄마를 찾아주는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이원이가 어쩌다 태어났고, 어쩌다 친엄마를 떠나 웬 국회의원 부부를 거쳤다가 주인공에게 오게 되었는지 걱정되었다. 그러나 주인공이 어린 이원이에게 맞추려고 고군분투하는 것이나, 전 애인이던 이원이의 친엄마를 찾아 딸과 함께 호주로 떠나는 걸 보면서는 갑자기 아빠가 된 것 치고 책임감 있게 행동하려 노력하는 주인공이 멋지게 느껴졌다. 반면 혼자 이원이를 낳았을 여자에 대해서는 가엾다고 느끼다가 점점 호감도가 떨어지고 있었는데, 마지막에 우주비행사로서 달에 간 것을 보고는 아! 하지만 텔레비전에 나오는 이원이 엄마를 보며 이원이 아빠가 사랑을 느끼는 걸 보며 왠지 엄마도 아빠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을 했다. <최악의 레이싱>은 책이 쓰인 2000년대 대학 캠퍼스와 그 시절의 풋사과 같은 사랑을 떠올려볼 수 있게 한 글이었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타지도 못하는 자전거를 태워주겠다고 하고, 또 그 말을 지키기 위해 일주일간 고군분투를 하는 남자. 사실 대학생이라고 하면 남자라고 하기에도 아직은 좀 어린 느낌이 (이제는) 드는데, 그래서 그런지 더 응원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온갖 친구와 선배, 심지어 교수님까지 끌어들인 자전거 대작전은 사실 그 모든 걸 알고 있던 앙큼하고도 사랑스러운 ‘그녀’가 톡 쏘는 고백을 함으로써 최종 성공으로 끝난다. 자신이 매일같이 자전거 타기 연습을 하며 넘어지고 또 넘어지던 것을 보고도 모른 척했다는 걸 안 주인공은 꽤나 부끄럽고 창피했겠지만, 이제는 여자친구가 된 그녀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그래서 더 좋아졌을 수도 있을걸? 나 같으면 그랬을 거다. 거짓말을 한 건 괘씸할 수 있지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랬다고 하면 제법 귀엽잖아. 누군가가 생각이 나서 더 킥킥거리며 읽었던 것 같다. <달팽이와 다슬기>는 앞의 두 이야기에 비해 너무 마음이 아픈 이야기였다. 이 글은 2007년에 쓰였고 책은 2013년에 나왔는데 지금이야 흔하다지만 당시에는 가시화조차 크게 되지 않았던 다문화가정에 대한 차별적 시선을 이렇게 담담하게 풀어내다니. 마침 2007년 당시 주인공과 동년배였던 나의 초등학생 시절을 떠올려보면 실제로 있었을 법도 한 일이라 더욱 울적했다. 그로부터 근 20여 년이 지난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도 여전히 다문화가정과 그 구성원을 향한 편견과 차별이 많이 남아있음을 생각하면 정말 우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왕>은 역시 2000년대의 어렴풋한 기억으로 풋풋하게 읽었던 것 같다. 비록 남산에 자물쇠를 채우진 않았지만 기념일에 근처 식당에서 자물쇠와 열쇠를 나눠가졌던 내 반쪽도 생각이 났다. 1년 전 대학 때문에 헤어진 여자친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벨기에 왕 앞에서 알지도 못하는 불어로 열심히 말을 하는 20살 남자애. 비록 커서 그 애와 결혼하진 않았더라도 여자친구 마음에는 평생 남을 소중한 기억일 것이다. 치기 어린 사랑은 완벽하지 않고 완성되지 않아서 그 자체로 좋다. 그래서 둘이 함께하지 않은 결말도 정말 좋았다.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는 낭만 치사량의, 정말 최고로 사랑스러운 중편 소설이었다. 백두산이 폭발해 비행기가 뜰 수 없게 되자 태평양 반대편으로 지구를 반 바퀴 넘게 돌아온 새신랑. 연이은 불운에도 어떻게든 방법을 모색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 남자. 미국에서 영국으로, 영국에서 터키, 몽골과 중국을 가로질러 북한까지 간 남자는 마지막 15km를 두 발로 달려 남한과 북한의 경계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여인에게 도착한다. 결혼식 한 시간 전에. 결혼식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남자는 깨닫는다. 결혼한다고 갑자기 세상이 달라지진 않을 거라고. 사랑하는 여자가 미워 보이는 날도 있을 것이고 함께 사는 게 호락호락하지 않을 날도 있을 거라고. 그럼에도 그 남자는 여자와의 결혼식을 위해, 여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시간 맞춰 한국으로 돌아갔다. 수많은 고난과 좌절에도 거리낌 없이, 주저함 없이. 여자가 방글라데시인이고 이슬람교도라고 반대하던 남자의 부모도 하물며 백두산 폭발도 그 무엇도 두 사람의 사랑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런 게 진짜 사랑인 것 같다. 처음 만난 순간처럼 뜨겁진 않더라도 그때 그 마음을 식지 않고 이어갈 수 있는 것. 이 글을 읽으며 나는 문득, 나도 결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7년이 넘게 내 곁에서 매일같이 있는 어떤 사람을 떠올리며. 괴물 이야기, 미래 이야기뿐만 아니라 사랑 이야기도 내 마음에 꼭 맞게 쓰는 사람, 곽재식. 트위터나 포스타입 계정을 보면 어쩐지 옆집 아저씨, 삼촌 같은 친근함도 느껴지는 작가, 곽재식. 곽재식이 낸 책들을 다 읽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지금처럼 차근차근 읽어나가면 언젠가는 그가 책을 내는 속도도 따라잡을 수 있지 않을까? 틈틈이 포스타입 글도 읽어야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낭만적인 이야기를 쓸 줄 아는 사람의 글은 단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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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톨스토이 문학전집 2)(반양장)
책
톨스토이가 이 작품으로 부활시킨 것은 네흘류도프와 카츄샤만이 아니었다. 그 시절 러시아와는 동떨어진,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나와 같은 사람도 이 책을 읽음으로써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일주일이 안 되는 시간 동안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네흘류도프와 카츄샤에 대한 나의 마음이, ‘범죄자’라고 불리는 이들과 모두가 우러러보는 명예와 권력을 가진 이들에 대한 나의 시선이 서서히 바뀌는 것을 느꼈다. 그중 가장 놀라웠던 것은 나의 분노와 증오도 사랑과 용서로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의 탄생이었다. 처음 나의 분노는 네흘류도프를 비롯한 남자들을 향했다. 카츄샤로 하여금 어려운 길을 걷게 만든 것은 네흘류도프와 다른 남자들이었다. 특히나 네흘류도프가 진심으로 그의 마음을, 몸을 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카츄샤는 타락(여전히 이 단어가 맞는진 모르겠지만)의 길을 걸었다. 그래서 괘씸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징역형을 기다리고 있는 카츄샤를 보고 나서야 자기 잘못을 깨닫다니. 그것도 자신은 떵떵거리며 배심원석에 앉아서. 당연히 카츄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카츄샤와 결혼하겠다는 다짐도 자의식과잉처럼 느껴졌다. 카츄샤의 지난날에 대한 보상으로 자신과의 결혼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으로 지난 세월과 그간 그가 받은 고통에 대한 보상이 완벽히 이루어지나? 그리고 카츄샤가 그걸 진정으로 원하는지 아닌지 어떻게 확신을 하나? 한참이나 고까운 눈으로 네흘류도프를 바라보았다. 변호사를 선임하고 이리저리 청원서를 쓰는 것이 카츄샤를 위한 척 시혜적으로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한 일로만 보였다. 그러나 네흘류도프는 카츄샤를 위해, 그리고 카츄샤와 함께 수감된 다른 이들을 위해 판사와 변호사 등 고위 관료들을 만나며 실제로 정말로 생각의 변화를 겪었다. 어느 순간 네흘류도프가 진심으로 변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사유재산, 특히나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그의 믿음으로부터 나온 행동-실제로 경작하는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는 것-을 보며 느꼈다. 물론 오랜 기간 사치스럽고 여유로운 생활을 해온 네흘류도프는 자신의 것이라 여기던 많은 것을 포기하는 게 정말 맞는 일인지 고민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면모가 오히려 네흘류도프가 ‘사람다운’ 사람임을 보여주는 지표처럼 여겨졌다. 카츄샤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맑은 그의 마음이 그의 깊은 곳에 살아 있으며, 다만 방탕하고 이기적인 생활 밑에 숨겨져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네흘류도프는 카츄샤를 위해 감옥의 안과 밖을 같은 시간 속에서 경험하며 사회의 부조리함을 깨닫는다. 그러한 깨달음이 가장 잘 드러난 부분은 배심원으로서의 둘째 날, 매트를 훔칠 수밖에 없던, 자신의 죄를 시인한 청년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였다. 230쪽에서 네흘류도프는 생각한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저 청년이 특별히 악한 사람이 아니라 가장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은 지극히 분명하다. 그리고 청년이 저런 사람이 된 것은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그런 사회적 환경에 놓였기 때문이다. 이런 청년이 사회에 생기지 않게 하려면 사람이 불행하게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사회적 환경을 먼저 없애는 것이 당연한 순리다. / 그런데 우리는 무얼 하고 있는가? 저런 청년과 같은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체포되지 않고 있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우연히 우리 손아귀에 들어온 저 청년만을 감옥에 처넣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게 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지극히 위험하고 의미 없는 일을 해야만 하는 환경으로 내몬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이와 같은 사회 구조의 병폐가 100년도 더 지난 한국에도 적용된다는 것에 통탄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렀음에도 다른 나라, 다른 사회에서 동일한 부조리가 발견된다면 이건 인간의 본성인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니 인간이 너무너무 미웠다. 증오스럽고 역겹기 짝이 없었다. 약하고 위기에 처한 사람들의 사정은 생각하지도 않고 무작정 손가락질하고 처벌하는 가장 보통의 사람들이 너무 끔찍했다. 231쪽에서 네흘류도프는 다시 생각한다. ‘만약 이런 사람들에게 주는 월급 중 단 100분의 1만이라도 사회에서 버림받은 존재들을 도와주는 데 돌리면 어떨까? 우리는 우리의 안전과 생활의 편리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노동과 용역을 제공하는 사람들로만 여기고 있는 이들을 도와주자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청년을….’ 작중 추후 카츄샤가 함께 지내게 된 정치범들 중 누군가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노동의 가치가 인정받아야 한다는 의견이 지지를 받는, 공평하고 평등한 세상을 위해 부유한 이가 그렇지 않은 이에게 나누는 것에 대한 언급이 금기시되지 않는 사회가 이 책의 배경이었던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오히려 10여 년 전보다도 이와 같은 생각이 억압받고 있는 걸 생각하면 참으로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 2025년에 ‘빨갱이’라는 단어가, 그것도 누군가를 조롱하고 낙인찍기 위해 사용되고 있을 수가 있지? 힘들게 삶을 영위하고 있는 타인을 위해 내가 가진 것을 나누자는 의견이 무슨 문제가 되지? ‘자유’라는 말에 지나치게 사로잡힌 이들이 자신의 자유를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 양 굴 때마다 지친다. 네흘류도프가 관리들, 판사와 검사, 변호사와 감옥 소장, 간수, 호송병들에게 느낀 역겨움을 나도 매일같이 느끼고 있었다. 다만 나는 권력보다도 인터넷에서 손가락을 놀리며 ‘자유로운’ 의견을 배설할 권리를 가진 이들 전반에 대한, 좀 더 폭넓은 혐오감에 심각하게 지친 상태였다. 네흘류도프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된 것은 이쯤부터였다. 257쪽의 서술은 꽤나 파격적이라 놀랐다. 글의 말미에 네흘류도프가 마태복음을 읽으며 그리스도를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고려했을 때 더욱 그랬다. 사실 이건 내가 종교 전반에, 특히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무지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감옥에서 죄수들을 모아 미사에 참석하게끔 하는 장면을 그리며 톨스토이는 말한다. ‘이 미사에 참석한 그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곳에서 이루어진 모든 일들이 사실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성 모독이며 조소를 퍼붓는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사제가 들고 들어와 사람들에게 입맞춤을 시킨, 끝에 칠보 구슬을 매달아 장식한 황금 도금의 십자가는 예수가 이곳에서 그의 이름으로 행해진 이 모든 일을 금지했다는 이유로 매달려 처형당한 처형대의 모양을 본뜬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굉장히 공감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당시 이런 서술이 이단적이라고 여겨지진 않았나 궁금했다. 러시아 정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적지만 당시 러시아의 많은 미사가 이처럼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을 때, 이는 미사를 진행하는 사제들 나아가 그들이 대변하는 종교, 러시아 정교의 전반적인 형식에 대한 도전이 아니었을까? 여기까지 쓰고 작가 연보를 보는데 아니나 다를까 1899년 장편 소설 <부활>을 발표하고 1901년 2월에 러시아 정교로부터 파문당했다고 적혀 있다. 아마 이 소설 덕분이었을 것 같다. 800여 쪽에 달하는 작가정신 출판의 <부활>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책의 3/4를 조금 넘긴 뒤에 나온다. 작열하는 7월, 이송을 위해 죄수들은 뙤약볕에서 몇 시간이고 걸어야 했다. 그 결과 가장 약한 이들 5명이 일사병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유형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감옥에서 나온지 하루도 되지 않아 비참하게 죽어버린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보고도 호송 장교, 간수장, 경찰, 경찰서장, 그리고 죄수들과 아주 먼 곳에서 이를 지시한 주지사까지 많은 이들이 아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그 무엇도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에 개탄하며 네흘류도프는 635쪽에서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비록 한 시간만이라도 그리고 아주 예외적인 어떤 한 경우에 국한된다고 할지라도 인간을 사랑하는 감정이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그러면 범죄가 없을 텐데.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죄를 짓고도 자기는 죄가 없다고 여기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을 텐데.’ 이미 여기서 네흘류도프는 부활을 예고하고 있었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사랑! 다른 이를 가엾게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하다면 범죄에 대한 선고도, 범죄도 없을 것이다. 심판받을 이도 심판할 이와 동등한 인간임을 안다면, 그러므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심판할 권리가 없음을 깨닫는다면! 어째서 누군가는 남들보다 돈이, 땅이 많다는 이유로 그들 위에 군림하는가? 돈과 땅이 있으면 권력이, 또 권력이 있으면 돈과 땅이 생긴다는 걸 아는 사람들은 욕심내는 것을 멈추지 못하고 더욱 긁어모으려고 한다. 그럴수록 가진 이는 더 갖게 되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더 가난해진다. 그리고 가진 이의 그렇지 못한 이에 대한 착취도 점점 더 당연한 것이 된다. 이게 다 욕심 때문이다. 그렇다면 욕심을 내지 못하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소유할 수 없게, 토지라든가 하는 것을 소유할 수 없게 한다면… 그 무엇을 한계 짓지도 그 무엇으로부터 한정 받지도 않는 그 노인처럼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쓰고 보니 아직 나는 분노 대신 사랑을, 증오 대신 용서를 실천할 준비가 안 된 것도 같다. 깨달음과 행동하는 것은 역시 많이 다르구나. 반성 또 반성. 비록 네흘류도프는 카츄샤와의 결혼이라는 맨 처음의 목표를 이루진 못했다. 카츄샤 역시 네흘류도프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음에도 그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시몬손을 택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라는 타인을 위한 변화가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변화를 겪었다. 그리고 부활했다.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네흘류도프는 카츄샤와 결혼하지 못했으나 좌절하지 않았다. 대신 카츄샤와의 재회, 그리고 그 이후로 겪고 깨달은 모든 것으로부터 더 많은 사람을, 가장 인간다운 인간들을 위하고 사랑할 미래를 향해 나아가며 이야기가 끝이 난다. 책은 여기서 끝났지만 네흘류도프의 삶은 이제 다시 시작이라는 것을 안다. 카츄샤도 그렇다. 그리고 나도, 이 책을 통해 부활을 겪은 나 역시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준비가 된 것 같다. 사랑으로 가득한 새로운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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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호의 악몽 2
책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으면서 다 읽은 책은 진짜 오랜만이다. 아니 처음인가? 오늘까지 반납이어서 그랬던 것도 있지만 탐험대가 테러 호를 떠나 킹윌리엄 섬에서 행군하다가 흩어진 부분부터는 진짜 정신을 못 차리고 읽었다. 크로지어가 벙어리 여자를 만난 이후부터는 실제로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여자가 툰바크와 치룬 것과 같은 의식을 치룬 뒤 탈리릭투그는 여자의 남편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어릴 적 메모 모이라 할머니와의 기억에서 늘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흰 옷을 입은 사제가 아닌 하얀 털로 뒤덮인 툰바크에게 자신을 바치는 장면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떠내려온 테러 호에 깃든 악한 이누아를 알고 미련 없이 배에 불을 지른 장면도 좋았다. 크루지어로 살아온 삶은 가슴에 넣어두고, 탈리릭투그로 또 다른 삶을 살아갈 준비가 된 것 같아서. 2권 후반부에 나오는 세드나는 이누이트 족에서 가장 유명한 신이다. 이전에 읽은 책에서 천문학자가 자신이 발견한 별에 세드나의 이름을 붙였기에 나도 대강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자른 세드나의 손가락에서 고래와 바다표범, 바다코끼리가 탄생했다. 그리고 세드나는 바다의 영혼이 되었다. 새로이 알게 된, 그리고 이 책 전반과 관련이 있는 이누이트 설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세드나가 만든 툰바크는 그의 통제를 벗어났다. ‘진짜 사람들’ 이누이트의 주술사들은 최고의 남녀 주술사들로부터 ‘시샴 이에우아’를 탄생시켜 툰바크와 소통하게 했다. 이리버스와 테러 호의 선원들이 벙어리 여자라고 부른 실나는 시샴 이에우아였다. 괴물 툰바크와 소통했고, 크로지어가 천리안을 가진 것을 알았다. 그리고 언젠가 같은 시샴 이에우아가 될 것을 알았다. 크로지어가 탈리릭투그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은 운명이었다. 그 운명을 알고 있던 것은 실나뿐이었지만. 실나가 말 대신 생각으로 전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해 크로지어는 그렇게 먼 길을 돌아왔던 것이다. 크로지어도 실제 인물이었다. 실제로 두 배가 실종된 지 거의 10년 뒤 이누이트 마을에서 그가 목격되었다고 했다. 이 책은 존 프랭클린보다 그에게 초점을 맞추어 쓰였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알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나는 정말 크로지어가 탈리릭투그든 다른 무엇이 되었든 이누이트 마을에서 고통 없이 지내다가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정말 재미있게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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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의 딸(하)
책
중국 근현대사에 관심을 갖게 된 20대 초 이후, 나는 중국이라는 나라와 중국 사람들, 그리고 공산주의와 공산당에 대해 편협한 시각을 갖지 않으려 무진장 노력을 해왔다. 그때는 지금처럼 한국 내 중국에 대한 혐오가 만연해지기 전이었기에 그러한 나의 노력은 큰 방해를 받지 않았다. 물론 언론에서는 조선족과 중국인에 의한 범죄가 과장되어 보도되는 경향이 있었으나, 다행스럽게도 그런 내용을 얼추 걸러 들을 수 있는 수준이었기에 내게 큰 영향을 주진 못했다. 내가 중국 근현대사에 관심을 보이게 된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은 <백 사람의 십 년>이라는 책이었다. 대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그 책은 내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백 사람의 십 년>은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중국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들을 수집한 것인데, 그동안 중국 내 수많은 사람이 명예를 잃고 가족을 잃었으며 생명까지 잃었다고 했다. 그것도 다른 외부 요인이 아니라 자신의 국가에 의해서. 너무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았으며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인간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어리석을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나름의 편견을 내려놓았다고 여겼는데, 이는 내가 가져온 중국에 대한 선입견이 ‘선입견’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그 뒤로도 나는 꾸준히 중국에 관심을 가졌다. 막 학기에는 중국과 북한 사람들, 재일교포에 대한 강의도 수강해 열심히 들었다. 코로나 시대를 지나며 나날이 중국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반감은 심해져만 갔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은 혐오 발언과 행위도 있었다. 그럴수록 중국에 대한 나의 마음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그리고 더욱 궁금해졌다. 한국에서 현대 중국이 가진 이미지는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 이웃 나라인 중국에 대해 우리가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이고,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은 무얼까? 나는 내가 제일 잘하는 것, 책을 읽음으로써 이를 해소하고자 했다. 올해 읽은 중국에 관한 책으로써는 세 권째에 해당하는 <대륙의 딸>. 이전에 읽은 두 권은 중국 역사와 철학에 대한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실제 중국에서의 삶을 기록한 자전적인 이야기책이었다. 심지어 청 말기부터 살아온 외할머니부터 어머니, 자신까지 3대에 걸쳐 이어지는 중국 여성들의 인생에 대한 일종의 회고록이었다. 상권에서 외할머니와 젊은 어머니의 삶을 다루었다면 이번 하권에서는 어머니와 젊은 글쓴이의 삶이 다루어졌다. 하권에서는 내가 중국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한 ‘문화대혁명’ 시절에 대한 글쓴이 가족의 기억이 담겨있었다. 공산당에 모든 삶을 바친 어머니와 아버지가 구금당하고, 폭력과 고문에 시달리고, 심지어 강제노동 수용소에 들어갔을 때는 마치 내 부모가 그런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마음이 찢어졌다. 가족들이 갈래갈래 떨어져 사는 시절에 대한 기록도, 외할머니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담담한 서술도 정말 내가 겪은 일처럼 숨도 못 쉬게 슬펐다. 한편 슬픔과 괴로움 속에서도 아름다움과 위안을 찾던 소녀 시절의 글쓴이에게는 연민을 느꼈고, 마오쩌둥 사후 중국에 자유의 바람이 불었을 때 글쓴이가 대학에 가고 하고 싶던 공부를 하는 부분을 읽으며 뛸 것처럼 기뻤다. 그밖에도 나는 글쓴이의 크고 작은 즐거움과 슬픔, 외로움을 함께 나누었다. 두 권으로 쪼개진 책을 읽는 내내 내가 글쓴이였고 글쓴이가 나였으며, 글쓴이의 부모를 내 부모처럼 공경하고 사랑했다. 이 책도 <백 사람의 십 년>처럼 중국 근현대의 어두운 면을 낱낱이 파헤쳤다. 공산당이 최초에 만인의 평등이라는 위대한 가치로 시작한 것은 맞지만 국민당이 그랬듯이, 또 모든 사상이 그렇듯이 점점 본래의 거룩한 목표는 희석되고 권력에 대한 야욕만 남았다. 마오쩌둥과 그의 부인 장칭을 비롯한 4인방은 자신들의 지위를 위해 중국의 인민들을 잔인하게 학대했고, 그것도 모자라 그들의 도덕성과 지성마저 상실케 했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우울하다고도 할 수 있는 지점을 살아가면서 글쓴이와 가족들, 그리고 수많은 중국 인민들이 겪었을 마음에 미약하게나마 공감하는 것은 괴로운 경험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런 상황 속에도 가족을 위하고 아끼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은 변치 않을 수 있음을 발견한 것은 참으로 소중한 경험이었다. 책을 읽는 것은 늘 즐거운 일이다. 내가 이런 책을 알아내고 열렬히 읽을 수 있어서 정말로 다행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을 수많은 독자에게, 나에게 기꺼이 내어준 글쓴이에게 진심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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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토피아 2
영화 / TV
내가 이걸 보려고 20대를 살아냈구나…. 10년을 기다린 게 아깝지 않을 정도로 너무너무 좋았다. 주디 홉스와 니콜라스 와일드가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상대임을 닉도 알고 주디도 알고 우리 관객들도 알게 해준 2편 정말 감동 그 자체였다. 사랑이 뭘까? 고개를 들어 닉주디를 보게 하라…. 1편에서는 사랑일 듯 우정일 듯 긴가민가한 닉과 주디의 관계가 차곡차곡 쌓여갔다면 이번 2편에서는 둘의 관계가 단순 우정은 아님을 보여주는 데 큰 의의가 있었다. 허니문 산장으로 올라가는 길부터 본격적으로 둘의 관계가 우정 이상임이 드러나는데, 주디가 선물로 준 볼펜을 실수로 떨어뜨려 박살이 나자 둘의 관계에도 균열이 생겼다. 주디는 속상해서 아무 말도 안 하고 계속 암벽을 타고 올라가기만 했고 닉도 그랬다. 그런데 그런 닉의 침묵이 단순히 미안함에서 오는 게 아닌 게 보여서 나는 너무 심란했다…. 그런데 산장에서 서로 마음 터놓고 이야기도 못 하고 헤어지게 되어서 정말 머리를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전개상 엔딩에서는 둘 다 살아서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파트너라고 얘기하겠지! 그렇지만 둘은 그걸 몰랐을 거고 주디는 닉이 잡혀갔을 줄만 알았을 거고 닉은 주디의 생사도 모르고 걱정했을 거고… 정신병이 온다는 너무 수동적이다. 내가 정신병에게로 간다(당사자성 발언). 그렇게 아무 말도 못 하고 산장에서 헤어진 이후 한참이 지나서야 둘은 솔직한 마음을 말할 수 있었다. 닉이 해독펜을 던져 주디를 살리고 주디가 떨어지는 닉의 손을 잡아서 살린 이후에. 서로 생사도 확인하지 못하고 떨어져 있는 동안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 모든 일이 다 끝나고 닉도 주디도 횡설수설하면서 그제야 진짜 자기 마음을, 네가 내겐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고백하는데 어떻게 눈물이 안 나냐고…. 닉주디 관계성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이면 엉 하고 울어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상영관에서 나만 울었다고 하지? 진짜 아 도저히 안 되겠다 둘이 빨리 결혼해라 애초에 둘이 서로 상처 주고 상처받은 이유가 너무 다른 둘이 서로를 너무 아끼고 사랑해서라는 게… 벅차기도 하고 이해가 가기도 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해내고야 마는 정의로운 주디와 되도록 쉽게 살고 싶은 닉이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갈등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1편 볼 때는 주디의 시선으로 닉을 봤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자꾸만 닉의 시선에서 주디를 보게 되었다. 어른이 된 걸까? 나이가 들면서 점점 주디보다는 닉에 가까워지는 내가 아쉬웠다. 그렇지만 닉이 주디를 보는 것처럼 나도 조금 어렸던 나를 되돌아볼 순 있었다. 다만 닉은 주디가 행여나 다칠까 걱정했고 나는 20대 초반의 나를 보며 좀 안타까운 것도 같다고 생각했다. 게리의 가족은 뱀이라는 이유로 당연하다는 듯이 누명을 썼고 너무 쉽게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나아가서는 모든 파충류가 포유류를 비롯한 동물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게 되었다. 동물들의 유토피아를 자처하는 주토피아가 “모든” 동물을 위한 곳은 아니었다는 게 인간들이 살아가는 사회랑 다를 바가 없어서 화가 났다.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와 자유를 준다고 믿는 현대의 체제가 정말로 공정과 평등을 보장하고 있나? 이제는 아닌 척하지도 않고 경쟁을 부추기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먼저 배척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은 자명하지 않나? 그리고 그들이 누구인지도. 마침내 기후 장벽을 만든 것이 게리의 할머니임이 밝혀지고, 원래 그들이 살던 곳으로 돌아왔을 때 뱀들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그 긴 세월을 버티고 견뎌 왔음에도 모두 주디를 안아주고 싶어 해서 또 한 번 울컥했던 것 같다. 링슬리 가족을 보면서는 괜히 팔레스타인 생각이 났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링슬리 가족처럼 귀여운 고양잇과(찾아보니 캐나다? 스라소니란다)도 아니면서 왜 난리지… 너네 뭐 되냐고. 링슬리 가족 중 유일한 순딩이 포버트를 보면서는 참 마음이 안 좋았다. 게리를 배신한 것도 이해가 가고… 게리도 왠지 이해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가족의 인정과 사랑은 누구든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거니까. 그냥 불쌍하고 안타까웠다. 그래도 안 죽고 차라리 감옥에 가서 다행이었다. 마지막에 아버지한테 파트너십에 관한 책 보여주는데 짠하고 귀엽고. 살모사 게리가 눈밭의 추위에 다 죽어가면서도 주디에게 우리는 성공할 거라고 계속 그럴 때… 처음에는 무슨 소리야! 지금 너 다 죽어가잖아ㅠㅠ 싶었는데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냥 그런 믿음 자체가 너무 눈물이 났다. 얼마나 복잡한 마음이었을까…. 내가 게리에게 Permission to hug 받아서 꼬오오오옥 안아주고 싶다…. 주토피아 최고의 디바 가젤 언니 사랑해요 3편 무조건 나올 것이고 이스터에그처럼 숨겨둔 쪽지에서 확인할 수 있던 것처럼 그리고 쿠키에서 깃털이 떨어진 것에서 알 수 있었던 것처럼 새들이 나올 텐데 과연 또 어떤 이야기를 풀어갈지 기대가 된다. 동물들로 우리 인간 사회의 문제점을 꼬집고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작품은 언제나 사랑스럽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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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말 사랑하는 공주 아닌 모투누이의 모아나! 실사화가 결정되었을 때, <인어공주> 실사화 때만큼 열렬하게 기쁘진 않았어도 많은 기대를 했었다. 그런데 그 기대 이상으로 아름답게 구현해낸 것을 보니 정말 문자 그대로 행복했다. 아름다운 폴리네시안 바다와 테 피티의 자연, 그리고 애니메이션에서 톡 튀어나온 듯한 사랑스러운 캐서린 라가이아까지. 드웨인 존슨은 말할 것도 없었고. 정말 좋았던 건 애니메이션 속 모아나가 ‘진짜’ 사람이 되면 캐서린 라가이아일 것만 같았다는 점이다. 모아나의 용감함과 단단함뿐만 아니라 사람을 당기는 매력이 있는 목소리까지 완벽했다. 장난스럽게 웃는 모습은 인어공주 역을 맡았던 할리만큼이나 사랑스러웠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사랑했던 실사화 인어공주를 떠올리며 마음이 찌뿌둥하기도 했다. 캐서린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실사화를 하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 하는 배우 싱크로율 논란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는데, 그건 원작의 모아나와 캐서린의 피부색이 같았기 때문임은 자명했다. 할리는 검은 피부를 가졌다는 이유로 애니메이션의 에리얼만큼이나 사랑스러운 목소리와 웃음, 톡톡 튀는 성격을 가졌음에도 지금까지도 전 세계 사람들의 조롱과 욕에서 자유롭지 못하는데. 실사화 ‘논란’을 만드는 건 배우나 캐스팅 담당자, 디즈니가 아니라 우매하신 대중님들이다. 그 누구보다 인종차별적 시선을 가진 이들이 ‘논란’을 만들어낸다. 그래놓고는 자기들이 정말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사랑한 척하는데, 예은이랑 누누이 말하는 거지만 그들은 다 가짜다. 진짜들은 내가 사랑하는 애니메이션이 실사화되는 것 그 자체에 기쁨을 느낀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이들은 이제 신경쓰지 않는다. 그래봤자 그들이 나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많이 보고 자주 봤을 리 없기 때문이다. 꺼져 이 가짜들아! 모아나 실사 영화의 좋은 점을 쓰려고 했다가 또 돌대가리들에 대한 분노만 발사했네… 이제 진짜 좋았던 얘기만 해야지. 캐서린만큼이나 드웨인 존슨도 좋았다. 사실 이건 내가 좋고 말고 할 것도 없긴 한데 애초에 마우이가 드웨인 존슨이고 드웨인 존슨이 마우이였기 때문이다. 실사화를 거치며 “치-후!”가 조금 얌전해진 것 같은 느낌은 들었으나 마우이 테마곡 You’re Welcome은 재녹음을 하지 않은 건가? 싶을 정도로 애니메이션과 똑같아서 정말 정말 좋았다. 애니메이션의 How Far I’ll Go는 굉장히 힘이 넘치는 느낌이었다면 캐서린의 How Far I’ll Go는 비교적 잔잔했는데, 오히려 그게 실사 모아나의 이미지와 맞아떨어지는 느낌이라 마음에 들었다. 갑자기 떠올랐는데 타마토아한테 갈 때 조개와 소라를 뒤집어쓰고 다 죽은 표정을 한 캐서린은 솔직히 애니메이션 모아나보다 더 귀여웠다. 캐서린은 애니메이션 모아나보다 뭐랄까, 진짜 ‘살아있는’ 느낌이 강했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당연한 말이겠지만…. 영조 말로는 <어벤져스 : 엔드게임>보다 그래픽에 돈을 훨씬 많이 들였다는데, 영화를 다 본 뒤 느낌은 정말 그럴 만했다고 느꼈다. 맑은 태평양 바다와 아름답다는 말로도 부족한 자연, 밤하늘을 뒤덮은 뭇별까지 모든 게 진짜보다 더 진짜 같았다. 헤이헤이와 푸아는 물론이고 모아나와 마우이가 만난 카카모라와 타마토아, 테 카와 테 피티까지 정말 세상에 존재한다면 저런 모습일 것 같았다. 특히 테 피티는 황홀할 정도였다! CG로 구현해낸 신을 보고 경이감을 느낄 수 있다니…. 마지막으로 할머니 얘기만 하고 이제 그만 써야지. 이번에는 할머니를 보며 10여 년 전만큼 울지는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안 울지는 않았고…. 언제나 모아나 편이던 할머니. 할머니는 할머니의 바람대로 가오리가 되어 모아나가 암초 너머로 나간 뒤에도 늘 곁에 있었다. 모아나가 가장 힘들 때면 곁에 있음을 알려주고 좋은 말도 해주고 있는 힘껏 안아준 할머니. 우리 할머니도 살아있었으면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었을까? 나를 있는 힘껏 안아주고…. 우리 할머니도 지금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오늘은 오랜만에 꿈에 나와주면 안 될까? 쓰고 보니 할 말 진짜 많았네. 쓰기 전에는 너무 좋았다, 재미있었다, 짱이다 끝. 이 꼴 날 줄 알았는데 의외다. 요즘 영화관에 보고 싶은 영화 많아서 좋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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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시공간 속에서 그 무엇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와 나의 존재는 나의 삶은 찰나였고 보잘것없다는 말보다도 덧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인류 전체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인류가 아무것도 아니었고 삼체인들이 아무것도 아니었고 지구를 비롯한 모든 곳에서의 모든 문명이 아무것도 아니었다.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우주의 수많은 문명 수많은 생명체가 존재했고 멸망했을 시간선 속에 우리는 무엇이었고 무엇일까? 나는 감히 우주를 연구하다 깨달음을 얻고 죽어버린 천문학자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책을 다 읽고 난 뒤 한참을 공허함 속을 헤매는데 문득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너무 외로웠다. 저 멀리 어느 별도 이만큼 외롭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 책을 읽기 전과는 차원이 다른 외로움이 밀려왔다. 절대 그 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는 생각을 얼마 전에도 했던 것 같은데, 어째서 같은 시기에 두 작품을 함께 접하게 되었을까? 나는 헤어질 준비를 하던 우울과 다시 볼을 맞대는 기분이었다. 세상에 둘만 남은 청신과 관이판처럼, 이 책을 읽고 난 후 내게는 나와 내 우울한 마음 우리 둘만 남아버렸다. 끝없는 우주에 우리뿐일 리 없다는 생각은 언제나 하고 있었다. 바깥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은 언제나 마음 한켠을 차지했지만 그게 내 전부였던 적은 없었다. 머리가 커갈수록 바깥 세계보다는 깊고 좁고 작은 세계가 궁금했다. 나는 광활한 세상으로 나가는 대신 점점 더 안으로 안으로 파고들었다. 물론 종종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날도 있었지만 잠깐뿐이었다. 나는 안일하게도 인간의 생각과 인간의 마음만이 궁금했다. 이기적이게도 그중에서도 내 마음과 생각과 감정이 가장 궁금했고 20대 내내 그것에만 몰두해 지냈다. 몰두했다고 하기엔 부끄러운 시간을 한참 보낸 뒤 나는 그래도 내 마음의 보석을 하나 찾을 수 있었다. 사랑…이라고. 너무 흔하고 너무 뻔하고 너무 거창하지만 나를 지탱해줄 수 있는 것을 찾아 죽지 않을 결심이 설 수 있었다. 3부의 주인공인 청신도 그랬다. 청신은 사랑으로 버텼다. 1890만 년이 지난 뒤에도 그가 버틸 수 있던 것은 사랑 때문이었다. 청신은 인류를 사랑했고 윈톈밍을 AA를 사랑했다. 웨이드도 사랑했을 것이고 관이판과 지자도 사랑했을 것이다. 기어코 안전한 소우주를 떠나 대우주로 회귀하는 결정을 내린 것도 모두 사랑 때문이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알지 못하는 어떤 누군가를, 끝이 보이지 않는 시공간을 함께 공유한다는 이유만으로 사랑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청신을 나도 사랑했다. 그래서 그의 끝없는 생존이 너무 괴로웠다. 청신은 끊임없이 살아가며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잃어야 했다. 부모님, 윈톈밍, 지구와 인류 문명, AA와 다시 윈톈밍까지. 지나친 사랑의 대가가 이렇게 끔찍한 것이라면 어째서 우리는 나는 사랑을 하도록 태어난 걸까? 하지만 그럼에도 사랑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음을 알고 있다…. 아마 청신도 그랬겠지. 청신의 사랑과 관련해서 인상 깊었던 구절이 몇 개 있었다. 간만에 좋아하는 문장에 인덱스를 붙여가며 책을 읽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는데, 무려 5개나 된다. 청신이 나와 유사한 가치관을 공유할 지도 모르겠다는 걸 깨달은 건 179쪽에서였다. “그날 밤 청신은 부모님 집 밖에서 날이 밝을 때까지 서 있었다. 밤바람이 불고 별이 반짝일 때마다 엄마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 3세기 뒤 그녀는 마침내 사랑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받은 사랑으로부터 사랑의 소중함을 알고, 그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마음과 결심을 가진 청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신만큼이나 사랑했던 인물 중 하나는 호주의 프레스 노인이었다. 여린 마음을 가진 청신에게 “얘야,” 하고 불러주던 첫 어른이었다. 프레스 앞에서 청신은 지구의 운명을 뒤바꾼 검잡이가 아니었다. 내내 그 일에 대해 말하지 않던 프레스는 244쪽에서 처음으로 청신의 결정에 대해 말을 건넸다. “그가 청신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 “하지만 네 탓이 아니야. 정말로 네 탓이 아니야.”” 프레스에게 이 말을 들은 다음 날, 청신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웨이드를 찾아가고 먼 훗날 헤일로 그룹을 그에게 넘긴다. 모두가 청신을 탓하던 그때, 프레스가 보여준 이해와 사랑은 청신을 타고 웨이드에게까지 전해졌다. 그 결과로 청신은 2차원으로 접히던 태양계를 탈출한 유일한(물론 AA도 함께였다) 사람이 되었다. 1890만 년이라는 시간을 넘어 자신이 간직한 사랑을 우주에 전할 기회를 가진 인류가 되었다. 물론 전 인류를 뒤로한 채 곡률 추진 엔진이 탑재된 광속 우주선을 타고 떠나던 705쪽의 청신은 사랑을 원망했다. “그녀는 결국 두 번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 두 번 모두 그녀에게 신에 버금가는 권력이 쥐여졌지만 그녀는 사랑의 이름으로 인류 세계를 나락으로 밀어 넣었다.…” 사랑의 이름으로! 내가 정말 좋아하는 말이다. 사랑의 이름으로… 아무리 생각해봐도 <삼체>와 <진격의 거인>은 유사한 맥락을 지닌다. 존재와 멸망과 사랑을 다룬다는 점이 가장 그렇고 또 여러모로…. 755쪽에서는 단기(일줄 알았던) 동면에 들어가기 전 관이판이 청신에게 말한다. ““그 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박사님에겐 잘못이 없다고 믿어요. 사랑은 잘못이 아니에요. 누구도 한 세계를 멸망시킬 순 없어요.…”” 사랑은 잘못이 아니라는 말은 청신에게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많은 위안이 되었다. 언제나 너무 사랑한 것을 후회하는 나에게도, 내 마음은 잘못이 없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그리고 나는 또 이 문장을 읽자마자 관이판이라는 인물을 사랑하게 되었다. 너무너무 뻔하게도. 인덱스를 붙인 문장 중 유일하게 사랑과 관련되지 않은 것은 646쪽이었다. 지도교수였던 딩이에 대한 꿈을 꾼 뒤 Ice는 깨닫는다. “생존을 가로막는 건 무능과 무지가 아니라 오만이다.” 그러나 그가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한참 전에 딩이는 깨달았고, 양둥은 그보다도 한참 전에 깨닫고 가장 먼저 죽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럼에도 Ice와 바실리, 레벌레이션호의 모든 승선원이 기꺼이 2차원화를 받아들인 것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멸망 앞에서 처절하게 탈출하고자 하는 몸부림에 대한 묘사를 볼 때마다 괴로웠기 때문이었다. 괴로움의 원인은 안타까움에 있었다. 사실 나는 생존에 대한 욕구? 본능?이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특히나 피할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죽음 앞에서는. 2차원화를 피하고자 우주선을 타고 떠나는 이들을 묘사한 문장들 위로 땅울림을 피해 달리지만 결국 거인들에게 밟혀 죽는 캐릭터들의 모습이 겹쳤다. 나는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지만… 그뿐이었다. 그뿐이다. 붙였던 인덱스를 모두 떼어내고 책장을 덮은 뒤 나는 다시 공허로 돌아왔다. 여전히 이 시공간 속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의 생각도 걱정도 고민도 행복도 불행도 내 삶도 모두 찰나일 것이다. 나는 청신이 아니고 청신 같은 평범하지만 위대한 인물도 될 수 없기에 내가 가진 사랑이 시간을 넘고 공간을 초월해서 퍼져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이 덧없는 존재의 덧없는 삶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금 당장 내릴 수 있는 답은 하나밖에 없다. 그냥, 주어진 시간을 살아가는 것. 내가 지나쳐가는 이 시공간 속에서 그냥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 그렇지만 나와 함께 찰나를 살아가는 이들을 사랑하는 것.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일 것이다. 사랑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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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기대도 안 했는데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기분이 유쾌하진 않다. 그렇지만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영원히... 지옥에 떨어지는 그날까지도. 다만 그전에 에렌, 네 마음만을 이해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다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너와 네 친구들은 알고 있는지. 왜 나에게는 너를 이해할 행운이 주어지지 않는 걸까? 너를 사랑하지 못해서 그런 거라면 이 고통스러운 애니메이션을 두번 세번을 봐서라도 너를 사랑하고야 말겠다. 너무 많은 이들에게 마음을 허락한 나머지 다 보고 난 이후에 내 마음은 너덜너덜 형체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중에서 가장 사랑한 게 한지라는 걸 이런 식으로 확인당하고 싶진 않았다. 스포일러 당하기 전부터 결국엔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다만 정말 죽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너무너무 좋아했는데... 그렇지만 마지막도 너무 한지다워서 방이 떠나가라 울면서도 자꾸 웃고 싶었다. 동료들을 위해서, 멋진 엔딩을 맞이해서, 엘빈과 모블릿을 다시 만나서, 당신은 행복했을 거라 믿고 싶다. 그런 당신을 사랑해서 나도 행복했으니까. 우린 너무 다른 세상에 사는 데도 참 닮은 점이 많았다. 나는 지크의 에르디아인 안락사 계획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한편으로는 평화롭게 대화로 해결하고자 하는 아르민의 주장에도 동의했다. 자꾸만 과거를 되돌아보며 괴로워하는 라이너의 등을 두드리고 싶었고 매번 자신없는 결단을 내려야 했을 장의 어깨를 감싸고도 싶었다. 미카사와 같은 사랑을 하고만 싶었고 한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연구하고 이해하는 사람이.. 사랑하다 못해 자꾸만 나를 투영하게 만드는 잔인한 작품이었다. 나는 아직도 인류 멸망의 꿈을 버리지 못했다. 결말에서 남은 20퍼센트의 인류가 대치하는 것을 보며 그 꿈이 약간 더 굳어진 것도 같다. 나는 여전히 <진격의 거인>과 <삼체>가 나와 생각을 같이한다고 본다. 인류에게는 희망이 없으니 멸망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다만 두 작품 모두 나에게 “그럼에도 희망이 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만은 않다. 자꾸 기대하게 되고 믿고 싶게 되잖아. 인류에게 가능성이 있다고, 평화로울 미래가 언젠가 먼 미래에는 있을 수도 있다고. 자꾸만 자꾸만 인간에게 기대하게 만드는 게 나는 너무나도 괴롭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미 사랑에 빠지고 만 것이다. 이 정신 나간 작품에게. 나는 이제 절대 이것을 보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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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멸망이라는 뻔하고도 진부한 환상과 사랑에 빠진 지는 오래되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끝끝내 인류가 가진 인간성(과연 실존하는 것일까?)과 사랑에 걸고 있던 일말의 기대를 떨치진 못했다. 양가적 감정 속에서 나는 때론 혹독한 인간불신을 보이는 염세주의자였고 한편으로는 사랑이 이 세상을 구할 거야! 하고 외치는 마법소녀 지망생이었다. 물론 그것도 다 지난 일이다. 끝도 없이 밀려드는 생각에 지쳐 이도저도 아닌 사람이 되어가던 지금 인류 멸망을 논하는 두 작품, <삼체>와 <진격의 거인>을 함께 접하게 된 것은 나에게 크나큰 행복이자 지나친 축복이었다. 어떻게 세상에 이런 작품이! 늘상 콘텐츠가 부족하다, 재미있는 거 없나, 말을 달고 살던 나에게 드디어 최고로 잘 맞는 작품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한꺼번에 두 개나. 이 순간 나와 책, 그리고 애니메이션이 세 개의 비성이 되어 삼체를 이루고 있다. <진격의 거인>의 지크 예거는 '에르디아인 안락사 계획'을 세운다. 거인이 되는 유전자를 타고나 전 세계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은 에르디아인의 유전자를 막는 것이다. <삼체>에서 삼체 세계의 원수도 1379호 감청원에게 말한다. 지구인은 삼체 세계의 지배 아래에 자유롭게 살 수 있다. 다만 출산은 제외하고. 책의 398쪽을 읽으며 나는 전율했다. 재생산을 막음으로써, 후대를 끊어버림으로써 멸망하게 만들겠다는 그들의 배려에 감응해서 옐레나의 말을 들은 아르민처럼 엉엉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만 싶었다. 현재를 살아가는 인류를 냅다 몰살시키지 않고 그들에게 남은 시간을 허락하는 너그러운 마음! 친구들은 내가 벽 안의 인류가 아닌 거인의 입장에서 생각한다고 웃었지만 나는 아무래도 인류가 아닌, '우리'가 아닌 이들의 시각으로 '우리'를 보고자 하는 욕망을 포기할 수가 없다. 그것이 거인이든, 외계 문명이든. 이것은 내가 나로서, 인류의 일원으로서 언제까지나 견지하고 싶은 태도이다. 꽤 자주 하는 말이지만, 인류의 자의식 과잉은 너무너무 비대하다. 너무 크고 무거워서 당장이라도 블랙홀이 될 정도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을 알지만 우리 인간은 너무 인간 입장에서 모든 것을 바라본다. 다른 종의 생물에 대해서 특히 그렇다. 책에 등장하는 에번스도 그에 염증을 느낀 사람이었다. 예원제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악행에 환멸이 났다면 에번스는 비인간에 대한 인간의 타자화, 나아가 무관심에 역겨움을 느낀 사람이었다. 나는 그런 에번스를 중심으로 형성된, 인류를 인류 바깥에서 이해한 결과로 멸망을 꿈꾸는 삼체 조직에 큰 동질감을 느꼈다. 비록 그 안에서도 종교적 조직인 구원파가 생겨난 걸 보며 금방 반가운 마음을 반쯤 접어야 했지만…. 이해는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중 하나이다. 전엔 상호 이해를 통해 '우리'의 범위가 넓어질 수 있다고 믿었다. 더 많은 사람이, 또는 사람이 아닌 다른 존재가 '우리'로 묶일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범위가 넓어질 때 차별과 혐오, 갈등도 줄어들 수 있을 테니까. 언젠가부터 좁힐 수 없는 간극도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다. '우리'의 범위는 유지만으로도 힘들었다. '우리'끼리도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매일같이 싸우는 판에 '우리' 바깥의 이를 '우리'로 만드는 건 생각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이해를 통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이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걸 알고 나니 마음이 푹 꺾였다. 지난한 피로 속에서 얼마나 오래 무감한 시간을 보냈을까? 이해라는 건 매우 중요하지만 너무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무지하고 무식한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적용되는 것이었다. 이해보다는 차라리 머리도 마음도 비우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 훨씬 쉽다는 사실도 깨달았지만 많은 이들은 그조차 어려워한다는 것도 함께 깨달았다. 내가 ‘우리’의 경계를 허물고 ‘우리’라 여겼던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 모두가 사라진 세상을 다시금 바라게 된 것도 이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두 작품으로부터 얻은 가장 크고 충격적인 깨달음은 우주에 대한 것도, 인류에 대한 것도 아니다. 그저 나 자신에 대한 것일 뿐이다. 나의 꿈, 잃은 지 오래라고 생각했던 내 꿈을 인지하니 마치 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나는 연구자가 되고 싶었다. 내가 한지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연구대상인 거인에 진심 어린 애정을 갖고 탐구하는 사람이어서이다. 내가 예원제를 동경하는 이유는 그가 내가 늘 우러러만 보던 천체물리학에 정통하여 기어코 외계 문명과 소통하고 나아가 인류 멸망의 초석을 다졌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어느 학문에 정통한 것보다도 내가 좋아하는 분야를 꾸준히 연구하는 사람이고 싶었다. 때늦은 깨달음에 충격을 받았으나 지금의 나는 무엇이든 물끄러미 바라볼 줄 아는 사람. 마음을 비우고 머리를 비울 줄 아는 가여운 어른! 잃어버린 꿈을 기억해내고 눈물 흘리는 것도 너무 어른스러워서, 사회에 잘 편입한 어른다워서 씁쓸해졌다. 역시, 나는, 너무 슬프고 불쌍한 ‘우리’는, 아무래도 멸망하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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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얼마 전 드디어! 내 인생의 절반을 함께한 SNS, 트위터와 결별을 선언했다. 물론 장장 15년에 걸쳐 활동한 SNS를 한 번에 딱 끊어내진 못했다. 당연하지! 나는 18살에 담임 선생님이 엄마랑 상담하며 보영이는 다 좋은데 트위터를 너무 많이 하는 게 문제라고 말씀하셔서(물론 정확히 이렇게 말하진 않으셨고 그냥 모 아이돌을 참 좋아한다는 식으로 얘기했는데 그 사랑이 전부 어디에서 이루어졌냐면 당연히 트위터였다) 수능 끝날 때까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피쳐폰을 쓴 사람이다(그렇지만 선생님을 원망하진 않는다. 그때도 지금도 그건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트위터라는 SNS가 생긴 이래로 트위터는 내 삶이었고 내 삶은 트위터였는데, 이제는 정말 우리가 멀어질 필요를 느꼈기에 큰 결단을 내렸다. 나는 이제 거짓 정보에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는 데 이골이 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극적인 내용을 담은 허위 사실에 대한 무분별한 유포나 확인되지 않은 가십을 두고 한 사람 한 사람이 한 마디씩 얹는 꼴이 보기 싫어졌다. 원래도 보기 싫었지만, 이젠 그걸 하나하나 접하고 내 시간과 감정을 쓰는 것이 큰 낭비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모든 한국어 트위터 유저가 한 마디씩 얹는 것을 보며 혀를 차는 것도 버겁다고 느낀 지 몇 년인데 최근 자동 번역 기능이 도입된 이후로는 전 세계인이 한 마디씩 얹는 걸 봐야 했다. 정말 참을 수 없게 지겹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결별 선언 약 2주째,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제법 강 같은 평화가 찾아온 마음으로 깔깔 웃었다. 엄청나게. 인간은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한다! 글쓴이는 당연한 일이라고 말한다. 인류 역사 이래 지금까지 그렇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인터넷과 SNS가 없던 때에도, 하물며 신문도 없던 때에도 거짓은 진실보다도 더 진실인 양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글쓴이는 그 이유가 거짓의 다채로움에 있다고 말했다. 진실은 올곧게 하나인데 반해 거짓은 무한하다는 거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언제나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을 떠올리고, 그중 또 어떤 사람들은 그걸 악용한다. 사기꾼이 된다는 것이다. 책에서 가장 충격적이고 웃겼던 사기꾼 이야기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고 하는데 미국 역사는 관심이 없어서 그렇군 하고 말았으나 이제는 나에게 꽤 관심의 대상이 된) 벤자민 프랭클린의 일화였다. 심지어 그의 구라 일화가 한 가지가 아니고 스케일도 꽤나 컸기에 읽는 내내 뭐 이렇게 골때리는 사람이 다 있어?(함박웃음) 하고 머리를 부여잡았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는 거창한 수식어에 비해 너무 치졸하고 얍삽한 거짓말로 상대를 바보로 만드는 게 어이가 없었다. 반면 포야이스 사건은 읽으면서 좀 괴롭기까지 했다. 전 재산을 털어 새 나라에서 새 삶을 시작하고자 한 사람들이, 배에서 내려 진짜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땅을 보았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멕그레거가 친 어마어마한 규모의 사기에 당했다는 걸 차차 알아가며 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포야이스에 이주하고자 한 사람들 대부분이 1년 이내에 죽었다는 사실은 나를 진짜 진짜 힘들게 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사기 행각과 거짓말 사건 등등이 있었는데, 글쓴이가 책 내내 위트 있게 말하고자 한 바는 그럼에도 너무 좌절하진 말자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거짓에 선동되는 건 당연하다. 더 자극적이고 더 재미있고 더 그럴싸하고 더 믿고 싶으니까.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서 그렇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실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진실을 알고자 하는 것이 잘못된 일은 더더욱 아니니 계속해서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 그렇지만 절대 좌절 금지. 한때는 사람들이 거짓된 정보를 믿고 실어 나르는 것이 싫어서 진실을 알리는 언론인이 되고 싶던 때도 있었다. 어쩌다 보니 언론인도 아니고 엄청나게 정의롭지도 못한 어른이 되었지만, 마음은 편한 것도 같다. 정말 이렇게 마음 편해도 되는 건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편한 기분이 들지만. 그렇지만 그때 이 책이 있어서 어린 내가 이 책을 읽었더라면, 또는 사명감을 갖고 언론인이 되어 이 책을 읽었더라면 지금처럼 재미있진 않았겠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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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정말 살다 살다 이렇게 보다가 내가 먼저 죽어버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이 든 애니메이션은 처음이다... 예배당 지하에서 있던 일까지만 해도 비교적 삼삼했는데 월 마리아 탈환 나가면서 진심 온 세상이 정신 병동인 것 같고 사람들 다들 어떻게 이걸 보고 제정신으로 살아가지? 시청자 여러분 전원 미치셨습니다!! 그리고 벽 안에 사는 여러분도 지금 벽 안팎에서 거인이랑 싸울 게 아니라고 님들이 지금 가장 급히 해야 할 일은 집단 상담을 받는 겁니다 제발... 나 진짜 일단 조사병단 애들부터 청소년 집단 상담 시작하고 리바이도 상담 필요하고 전 국민이 순서대로 상담이랑 인지 치료 병행 실시해야 한다고 본다 거인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지금!!! 3기 2부 대부분을 은지네 집에서 다같이 보고 뒤에 부분 3개 회차만 따로 봤는데 진짜 은지 집(특: 9층)에서 여러 번 창밖으로 뛰어내릴 뻔했다. 벽 하나 끼고 이쪽 전멸 반대쪽도 전멸하는 작전 하고 아 진짜 200여 명 갔는데 10명?도 못 돌아온 거 실화냐? 근데 신병들 짐승거인 쪽으로 리터럴리 자살특공대ㅠㅠ할 때보다도 더 괴로웠던 건 아르민이 불에 타 죽어가면서도 버틸 때... 지금껏 보면서 찔끔찔끔 울긴 했는데 이땐 너무 많이 울어서 옆에 수건으로 얼굴 감싸고 봤다. 근데? 이때보다 더 괴로웠던 때는? 리바이가 주사를 엘빈에게 놓을 지 아르민에게 놓을 지 고민할 때... 그때 특급 정신병 와서 진심 진짜 뛰어내릴 뻔 실제로 그 부분까지 보고 은지에게 더는 못 보겠다 언니 죽는다 선언하고 보는 걸 관뒀음. 어제도 은지랑 피부과 갔다가 저녁 먹을 때 이때 리바이가 고민했을 거 상상하면서 둘 다 같이 머리 부여잡았고.. 한지 죽은 줄 알았을 때는 사실 실감이 안 나서 멍한 상태였는데 나중에 모블릿이 말 그대로 자기 한 몸 바쳐 구해낸 걸 알고 또 눈물을 흘렸다... 수도꼭지 거인이라 불러주세요. 마지막에 이제 세카이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에렌이랑 같이 나도 흑화함... 진짜 내 세상이 무너졌어 를 느꼈을 에렌의 마음에 너무 이입해서 봤다. 사실 이때까진 에렌에 큰 관심 없었는데 아 지금까지 에렌이 겪은 정신적 시련은 아무 것도 아니었구나 싶어져서 너무 심란했다. 이런 걸 보니 벌써 에렌을 전보다 좀.. 더 딱하게 여기게 되었고 차라리 이 땅딸보 아저씨! 헉 하던 에렌이 벌써 그립다. 흑흑 근데 이 땅딸보 아저씨! 하고 라이스 욕하다가 뒤에 있는 땅딸보 아저씨(본명 리바이 아커만) 인식하고 헉 하는 거 진심 너무 웃기고 좋아서 몇 번씩 돌려봄... 이제 제 최애 장면은 청소 리바이가 창문 여는 게 아닌 이 땅딸보 아저씨! 헉 장면입니다. 4기 너무 기대되고 너무 두렵다. 나부터 솔선수범해서 상담 치료를 받으면서 보는 게 좋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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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진짜 제정신 아니네요... 십여 년 전에 보면 너무너무 힘들 것 같아서 안 봤는데 그러길 정말 잘했다. 그때 봤으면 진짜 거짓말 안 치고 죽어버렸을 듯 구구절절 쓰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내일 써야겠다. 나 너무 힘듦 다른 게 아니라 이것 때문에. + 아 진짜 깜짝 놀랐다... 세계관 설정이나 스토리 라인이나 캐릭터 구성이나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어서 약간 충격까지 받음. 왜 사람들이 열광하는지 진짜 알 것 같았다. 단순히 거인 때려잡고 살아남는 인류 이야기 그 이상이었다. 정말 좋았고 힘들었던 건 등장인물 개개인의 서사를 보여줌으로써 거인에 대적하는 사람들을 인류라는 하나의 덩어리로 볼 게 아니라 거인의 존재에 영향 받는 한 사람 한 사람으로 봐야 한다고 명시한 것. 주인공 에렌이나 미카사뿐만 아니라 스쳐 지나가는 수준의 캐릭터들에게도 하나의 이야기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죽을 때 너무 힘들었고... 특히 나는 페트라를 좀 사랑할 뻔도 했는데 마음이 찢어져서 아무도 안 좋아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거인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한지나 인간미 있는 장 그리고 알 수 없는 매력의 리바이 뭐 죄다 내 마음 속에 벌써 한 자리씩 차지하려고 하는데 난 이제 1기 겨우 봤을 뿐이고. 은지가 3기 4기 가면 정신병 심화과정 밟는다고 했는데 진심으로 걱정된다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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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의 그림, 하면 떠오르는 건 단연 타히티의 풍경이다.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타히티의 여인들을 보며 나도 그곳에 가고 싶었다. 사실 고갱을 알게 된 것은 그의 그림이 아니라 고흐 때문이었다. 절친한 친구였던 둘은 고흐의 우울이 심해지자 파국을 맞는다. 피로 물든 붕대를 귀에 감은 고흐를 뒤로 하고 도망치듯이 떠난 고갱을 상상하며 나는 둘이 아니 정확히는 고갱이 고흐를 사랑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그에게 관심이 갔다. 그의 그림을 찾아보게 되었다. 뚜렷한 색채가 아름다웠으나 그보다는 그림에서 느껴지는 타히티에 대한 애정이 인상적이었다. 그때부터 나도 타히티가 궁금했다.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는 자유로운 사람들 틈에서 후덥지근한 공기를 마시며 그림을 그리는 고갱이 나였다면, 내가 스트릭랜드였다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어릴 때는 이걸 읽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스트릭랜드를 가여워했는지, 아니면 경멸했는지? 스트릭랜드를 부러워하는 지금의 나와 달리 어린 나는 스트릭랜드에 대해 어떤 가치 판단을 내렸을까? 그땐 내가 달을 좇을 줄만 알고 6펜스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바닥에 떨어진 6펜스를 주워 달 그림을 사는 데 쓰는 그런 어른이 될 줄은 모르고. 그래서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심술궂고 괴팍한 찰스 스트릭랜드를 동경했다. 그의 성격도 결단도 예술성도 내가 죽어도 갖지 못할 것이어서. 나는 끽해야 그가 경멸하는 인간 중 하나가 될 수나 있을까. 그림을 그리기 위해 지금까지 누려왔던 모든 것을 뒤로 한 사람의 인생은 굴곡질 수밖에 없었다. 책을 정신없이 보게 된 데는 자극적인 이야기의 영향도 있겠으나 나는 그의 못된 성질에도 자꾸만 모여드는 그의 주변 사람들이 궁금했다. 기어코 아내까지 빼앗긴 더크 스트로브를 비롯하여 말년에 그가 나병에 걸렸어도 죽을 때까지 떠나지 않았던 아타와 아닌 척 늘 그의 근처에 있던 주인공. 그들은 스트릭랜드의 어떤 점에 끌렸던 것일까. 남들에겐 관심도 없고 혼자 있기만을 원한 스트릭랜드에게 애정을 붓는 사람들이 끊임없던 이유는 글쎄, 그들도 스트릭랜드가 가진 곧은 심지를 동경한 게 아닐까? 미술에 대한 열정을, 집념을, 그 외에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맹목적인 마음을... 내게 있어 달은 예술이 아닌 세상이었다. 그런 점에서 내가 달이라고 생각한 건 사실 6펜스 동전이었을 지도 모른다. 세상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이상적이라기 보다는 세속적이니까. 외로운 사람들, 삶이 버거운 사람들을 돕고 싶었고 그것이 진정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믿었다.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일. 그게 내 달이었고 내 꿈이었다. 그러나 대학에 입학한 이후로 자꾸만 내 시선은 아래로 아래로, 하늘이 아닌 땅을 향했다. 나에겐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면서도 단단함을 유지할 마음과 정신이 없었다. 코로나를 핑계로 대학원과 여러 기업 사이에서 방황하던 나는 결국 바닥에 쭈그려 앉아 떨어진 동전이 있나 없나 들여다만 보길 선택했다. 그래 이게 내 선택이 아니라고 할 순 없다. 그렇지만 자꾸 슬퍼졌고 스스로가 싫어졌다. 동전을 쥔 내 마음 속에는 언제나 달이 떠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는 나도 스트릭랜드 같은 용기를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게 내 꿈을 쫓아가는 일이든, 먼 나라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사는 일이든. 그것 또한 내 달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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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내 지난 20대를 돌아보았다. 나의 20대는 분노로 가득했고 정의감과 대의명분, 억울함과 피해의식이 뒤섞인 혼합물이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지 조금 되었다. 과연 내가 20대 내내 느낀 분노는 정당한 것이었을까? 그 분노가 정말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을까? 그저 나를 갉아먹는 건 아니었을까? 한편으로는 그때를 그리워하기도 했다. 지금의 나는 현실과 타협하고 지금에 안주하고 있는 건 아닌가? 더 비판적이고 건설적인 일에 종사할 수는 없었나? 이게 내가 바라던 내가 맞나?… 과거를 돌아보든 현재를 직시하든, 내 마음을 지배하는 건 불안과 회의감이었다. 늘 그랬듯이. 글쓴이는 스코틀랜드 아니, 영국 전 지역을 통틀어 가장 가난하다는 글래스고 지역에서 나고 자랐다. 그는 자신의 불우한 가정사와 끝없는 가난에 자신을 내던졌다가 어느 순간 마음을 다시 먹은 사람이었다. 술과 약물에 의존하던 삶을 뒤로하고 래퍼로서, 활동가로서, 그리고 이제 작가로서 자신의 삶을 재구성하는 단단함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아주 담담하게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한다. 그 장면을 읽으며 나는 ‘중간 계급’으로서 ‘노동 계급’인 그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뒤늦게 너무 시혜적이었다고 자책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나를 용서했다. 책을 읽는 내내 나에게 그럴 수도 있다고 어깨를 두드려 주고, 중요한 건 지금처럼 그렇게 스스로를 돌아보고 지난날과 과오를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발판 삼아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정체성 정치, 교차성의 개념에 대한 좌파의 선호와 이를 이용만 할 뿐인 일부 사람들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는 조금 섬찟하기도 했다. 20대 내내 내가 가장 중요했던 개념이 바로 교차되는 정체성이었기 때문이었다. 글쓴이는 스스로 좌파라고 하면서도 일부 좌파가 이러한 개념을 오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어 잘 읽히지 않았다. 내 10여 년이 부정당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심호흡을 하고 잠시 책과 떨어진 뒤에,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읽으니 그의 말도 이해가 갔다. 일단 우리는 닮은 구석이 많지만은 않았다. 나는 그의 말마따나 ‘이성애자 백인 남성’을 증오하는, 퀴어(맨날 농담조로 이젠 거의 뭐 헤테로다라고 말하고 다녔지만 나는 여전히 나를 퀴어로 정의한다) 아시안 여성이었다. 그는 영국에 사는 이성애자 남성이었다. 나는 부족함 없이 자라 알아주는 명문대를 나온 뒤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 중간 계급이었고, 그는 물질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풍족했던 적이 부족한 노동 계급이었다. 우리의 공통점이라고는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뿐이었다. 그런 그가 내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지적한 것은 나와 내 친구들, 비백인 여성들을 싸잡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금 천천히 깨달은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하지만 분명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그를 경청했고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려 노력했다. 그리고 그는 나를 도왔다. 자기 생각을 명확히 피력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드러냈다. 가난으로 점철된 어린 시절이 아닌, 자신이 전부 옳다고 옳은 일을 위해 행동한다고 당연하게도 믿었던 불과 몇 년 전을. 나는 여전히 용기가 부족하다. 그렇지만 나를 돌아보고 있고, 나의 미숙했던 모습과 실수를 인정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해할 노력도 하지 않고 무작정 비난하던, 나와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생각해보려고 애쓰는 중이다. 여전히 존재하고 오히려 시간이 지나며 더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여성 혐오, 외국인 혐오(특히 중국에 대한), 장애인 혐오에 대해서는 솔직히 이해해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글쓴이가 이민자 혐오를 하는 청소년들과 대화하고 그들 삶의 궤적으로부터 그 이유를 알아내고 이해한 것처럼, 나도 그렇게 노력하고 싶다. 그래서 너는 혐오자야, 하고 손가락질하기 전에 생각을 조금 더 하려고 한다. 물론 여전히 경멸하고 분노를 느끼겠지만 최소한 한번이라도 그 입장에서 생각해보려는 노력을 하고 싶다. 글쓴이가 알려준, 무엇보다도 용감하고 성숙한 태도는 바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것이었다. 최근 많은 사람이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할 줄 모르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혹시 나도 그러진 않았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부끄럽고 창피해서 나의 실수를 남 탓으로 돌리진 않았는지 오히려 이를 지적한 이에게 화내거나 비아냥거리진 않았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가 잘못을 저지른 상대에게 진솔하게 사과를 전하고 진심으로 다가가는 용기가 필요하다. 누구나. 이런 용기를 갖고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 사람이 가장 성숙한 사람, 어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업무 시간 틈틈이 카톡으로 고민을 들어주다 나와 닮은 점이 아주 많은 친구에게 너 정말 어른 같다는 말을 들었다. 이 책을 70% 가까이 읽은 참이어서 부끄럽고 민망했다. 나는 아직도 멀었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는 나를 이렇게 좋게 봐주기도 하는구나. 그래도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더 좋은 사람, 더 성숙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글쓴이의 말마따나, 체제와 사회를 완벽하게 바꾸는 건 아주 더디게 진행될 것이고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은 절대 못 볼 것이기에. 가장 바꾸기 쉬운 ‘나’부터 더 나은 것으로 바꾸는 실천을 하다 보면 내 주변부터라도 조금씩 바뀌어 어느 날, 그 어떤 노래 가사처럼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누군가 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어보면 대답할 수 있길. 지나간 세월에 후횐 없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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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대한민국이 누리고 있는 혜택의 전신이 공산주의에 있음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단순히 복지 정책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수립부터 보전까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미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라는 말은 금기시된다. 민주화 운동의 시대를 지나며 마르크스 철학을 비롯한 사회학, 사회주의에 대한 인식은 형편이 조금 나아졌으나 공산주의만은 여전히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최근 들어 공산주의에 대한 몰이해에서 오는 막연한 분노가 더욱 심해진 것도 같다. 심지어 지난 정부는 잔존 공산 세력 척결을 내세우기까지 했으니.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한반도에 근대화를 가져오는 데 큰 역할을 한 건 사실임에도 우리는 우리 역사에서 그들을 뚜렷하게 인지하지 못 한다. 당연하게도, 민주주의의 탈을 쓴 민족주의 때문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공산주의와 민족주의가 우선시하는 가치에는 차이가 있었다. 해방 이후 남북한이 이념에 따라 갈라지기 이전부터 그랬고, 이후 6·25 전쟁을 겪고 한반도가 둘로 쪼개진 이후로는 더욱 그랬다. 대한민국 정부는 6·25 전쟁 이후 북한에 대한 증오를 국가 감정으로 삼아 나라를 단단히 뭉칠 필요가 있었기에, 북한을 악마화하고 북한의 건국 이념을 비가시화함으로써 이를 실현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학교에서 늘 한국사를 공부하면서도 조선의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게 되었다. 정규 교육에서 배우는 공산주의와 관련된 일제 강점기 조선 단체는 신간회 정도뿐이다. 이마저도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가 섞여 있었던 조직이어서 그나마 교과서에 실린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조선에 공산주의자들은 분명히 존재했고, 무장투쟁과 파업 등 많은 것을 이끌었다. 일제 강점 아래에서 조선의 근대화에 분명한 기여했다. 그리고 북한뿐만 아니라 지금의 대한민국에까지 그 영향이 미치고 있다.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1930년대 국내파 풀뿌리 활동가인 이재유의 공산주의적 테제였다. 그가 투옥 중 작성한 글에서 주장하는 바는 다음과 같았다. 실업, 질병, 노령 등의 보험. 모성 휴가. 동일노동 동일임금. 학교 내 민주화. 일 7시간(청소년은 6시간), 주 40시간 노동. (기혼 남성 노동자에 대한) 최저 임금…. 2025년 지금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주장하고 있는 것들이었다. 일부는 실제로 이루어졌고 일부는 아직도 미흡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와 너무나도 일치한다.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고 소외되는 사람들을 모두 보듬는 것이 공산주의라면 우리 사회에도 공산주의에서 중요시하는 것과 같은 가치를 공유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책을 읽고 나니 냉전 시대를 지난 2025년에도 여전히 반공, 멸공을 외치며 정치 관념 차이를 핑계로 그 가치를 폄훼하는 극우 진영이 더욱 한심하고 안타까웠다. 무엇을 위한 우익일까? 우익이라고 하면 경제 발전과 국가 존속 등 보수적이라고도 하는 가치들을 우선시하는 진영을 의미하는데, 요즘 우익을 표방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냥 자신과 다른 사람은 배척하고 함부로 혐오하고 싶어서 그러는 것만 같다. 좌우에 대한 명확한 이해도 없으면서…. 그런 사람들이 꼭 읽어야 하는 책인데 절대 안 읽겠지. 답답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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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서른 마이멜로디와 쿠로미를 보고 눈물을 흘리다... 너무너무 사랑스럽고 너무너무 예쁜 이야기였어.. 처음엔 마리랜드를 엉망으로 만들고 마이멜로디와 친구들을 갈라놓은 피스타치오도 미웠는데 나중에 곰팡이 핀거 보고 쫌 슬펐다. 그래도 곰돌이 아버지 왕도 돌아오고 다 행복하게 잘 끝나서 다행이야!! 나도 마이멜로디처럼 다른 친구들의 행복을 진심으로 기뻐할 줄 아는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다. 플랫처럼 위험에 빠진 친구를 구하러 갈 줄 알고 쿠로미처럼 친구의 소중함을 깨달을 줄 아는 그런 친구가 되고 싶다. 나도 이제 마이멜로디처럼 모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랑스럽게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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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진짜 너무너무 재밌었다…. 이렇게 순수하게 재미만을 느낀 책은 정말 오랜만인 것 같은데. 명왕성을 행성에서 왜소행성으로 강등시킨 장본인이자 이 책의 글쓴이인 마이크 브라운은 단순히 명왕성 킬러가 아니었다. 이 사람은 세상에서 제일 유쾌하고 로맨틱한 천문학자였다. 나도 어릴 때 제일 좋아하던 행성이 명왕성이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제일 좋아하던 여신이 아르테미스였다면 제일 좋아하던 남신은 하데스였다. 그래서였기도 했고, 왠지 저 멀리 떨어진 작은 행성에 마음이 간 것도 있었다. 천왕성, 해왕성 저 너머 저 멀리에 있는 아주아주 작고 추운 행성. 신비하고 특별해 보였다. 아마 다른 많은 사람도 그래서 명왕성을 좋아했을 것이다. 그런 나에게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명왕성이 이제 행성이 아니랬다.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이 아니라 수금지화목토천해에서 이제 끝나야 한댔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괜히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등교했지만 하루 온종일 명왕성 생각을 했다. 집에 오는 길에도 그 생각뿐이었을 것이다. 내가 어른이 아니어서, 명왕성이 태양계 행성 목록에서 퇴출되는 걸 막을 수가 없어서 아쉬웠었다. 그러나 벌써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 그 명왕성을 죽인 장본인이 쓴 책을 읽고 있자니 그 모든 결정이 납득이 갔다. ‘행성’의 개념과 정의를 바로 잡기 위해서 자신이 발견한, ‘열 번째 행성’이 될 수도 있었던 그 별의 지위도 같이 낮추었다. 속이 쓰릴 법도 했을 텐데, 그는 시종일관 자신이 생각하는 ‘옳음’을 견지했다. 당시의 회고록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이 책에서도 그는 아쉬움을 한 번도 내보이지 않았다. 책에서 그는 진심으로 제나가 에리스로 변경됨에 기뻐했고 그게 옳다고 믿었다. 나는 그 점이 이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멋진 면이라고 생각했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대로 밀고 나가는 힘. 나도 이렇게 단단한 사람이고 싶다고, 생각하며 동경하는 마음까지 품었다. 그밖에도 글쓴이는 여러 방면에서 참 호감이 가는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일단 400여 쪽 가까이 되는 책 한 권 내내 유머러스하게 이야기를 풀어낼 줄 아는 사람이었고, 글을 굉장히 흡입력 있게 쓰는 사람이었다. (물론 번역도 한몫 했겠지만.)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족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로맨티스트였다. 그가 지금의 아내 다이앤을 만나 연애하게 된 순간부터 결혼, 피튜니아(릴라)의 임신 이후 준비 과정, 그리고 릴라가 태어났을 때까지 전부 이 책에 담겨 있었다. 그는 천체 X부터 산타, 제나, 이스터 버니까지 4개의 별을 발견한 과정 틈틈이 그와 그의 아내와 딸의 일상도 전해 주었다.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는 그 가족의 모습이 정말 행복해 보여서 나까지 행복한 기분이었다. 다이앤과 릴라는 우주의 모든 별을 다 준대도 그가 바꾸려 들지 않을, 마이크 브라운의 가장 빛나는 두 별임에 분명했다. 어릴 때 상상한 나의 미래 중에는 우주비행사는 없었어도 천문학자는 있었다. 지금 이 별, 지구에서의 나는 비록 아니지만 이 우주 어딘가 다른 별에 다른 세상에 또 다른 내가 있다면 마이크 브라운 같은 그런 천문학자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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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부분 생략) 글쓴이는 미국 뉴욕에서 정신과 레지던트를 거쳐 정신과 의사로 일하면서 겪은 일들을 공유한다. 정신과 의사로 그는 많은 환자들과 보호자들, 다른 의사들을 만났다. 그들은 글쓴이를 의사 선생님으로 대하기도 했고 종종 아시안 이민자로만 대하기도 했다. 그 역시 환자들을 색안경을 낀 채 바라보다가 반성하기도 하고, 자신이 당한 인종차별에 공감하지 못하는 교수로부터 상처를 받다가도 공감하며 어깨를 두드려주는 동료로부터 위안을 받기도 했다. 그 많은 일을 겪으면서 깨달은 것은 공감에 대한 것이었다. 단순히 내가 타인이 겪는 어려움과 유사한 것을 겪어야만 공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깊이 있게 생각하고 타인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나와는 전혀 다른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도 공감할 수 있다는 것. 글쓴이가 의사로서, 이민자로서, 한 아이의 부모로서 자신의 상황에 비추어 공감할 수 있는 환자들도 있었지만 아닌 환자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는 동성애자, 조현병 환자, 노숙자, 트랜스젠더 등 다양한 환자 한 명 한 명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공감하려고 노력했다. 공감은 단순히 상담사나 의사들에게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게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 살아가기 위해서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덕목이다. 하지만 지금도 너무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다른 인종, 다른 성별과 성적 지향 등을 이유로 타인을 배척하고 너무 쉽게 혐오한다. 중국인, 조선족, 여성, 트랜스젠더, 노인, 아동, 장애인…. 다르다는 것이 조롱과 차별의 이유가 된다, 너무너무 쉽게. 글쓴이는 공감에 대해 무한히 강조함과 동시에 한국에서 정신과와 자살에 대한 인식이 여전히 부정적임에 개탄한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사람들은 자살을 극단적 ‘선택’이라고 부른다. 글쓴이가 브런치에 그 글을 올린 지 5년도 더 지났음에도. 내가 죽지 못한 이유는 사실 행위 자체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성공한 뒤 나와 그보다도 남은 가족들에게 씌워질 낙인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지금 죽는다면 좀 다를까?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여전히 두렵다. 이제는 덜할지라도, 종종 생각나면 고개를 저어버리는 이유 중 큰 부분을 차지하는 건 프레임에 대한 두려움이다. 정신병자, 자살자와 그 가족들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 손가락질, 시선. 나는 여전히 내가 정신병자임을 알리길 꺼린다. 아마 앞으로 오랜 기간 더 그럴 것도 같다. 하지만 언젠가는 내가 매일 아침 항우울제를 먹고 매달 정신과에 정기 검진을 다니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말할 날이 오길. 그때까지 살아 있길. 그래야 우리 의사 선생님의 말대로 오래오래 살다가 나중에 그곳에서 만날 때, 언니가 보지 못했던 것들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 다 좋았더라고 이러했더라고 말해줄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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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결론이 뭐라고? 하는 질문에 대한 답보다도, 존재 자체로써 더 큰 의의가 있는 책. 프레이저가 <황금가지>라는 책으로써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제법 산만하다. 프레이저를 비판한 이들의 말처럼 수많은 인류 집단의 수많은 사례를 두서없이 나열한 것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촘촘한 열거 자체가 인류학에, 철학에, 뿐만 아니라 문학과 사회학, 수많은 학문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은 아무리 말해도 부족할 것이다. 발데르의 죽음, 일일이 쓸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그리스 신화, 이래저래 접했던 세계 여러 나라의 관습들은 단순히 흥미로운 이야기 이상이었다. 프레이저가 말하는 ‘미개하고 원시적인’ 습속들은 그가 죽고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도 모든 인류의 몸과 마음에 살아있기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내 머릿속에도 제사나 49재 등이 휙휙 스쳐 지나갔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내 머릿속에서는 더 많은 것들이 과거를 지나 달려갔음에 분명하다. 비록 상아탑 속에 있었지만 언제나 망원경을 들고 창밖 멀리 바라보지 않았다면 과연 이 책이 나올 수 있었을까? 실제로 다른 이들과 크게 어울리지 않았던 프레이저의 삶은 상아탑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는 상아탑 바깥 저 머나먼 곳에 그의 ‘영혼’을 두고 늘 그곳에 마음을 보냈던 사람이었으며, 그의 마음과 영혼은 자유롭게 상아탑 바깥을 모험하고 탐구하며 종종 상아탑으로 이야기를 들려주러 오갔을 것이다. 어쩌면 그의 ‘영혼’은 육신이 스러진 이후에도, 지금까지도 세계를 돌아다니며 수많은 이들과 어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정말 그렇다면 언젠가는 나에게도 잠시 들러주길! 당신께 해주고 싶은 말이, 들려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정말 많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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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성주의에 기댄 채, 냉철하고 공정하다고 자부하는 이들이 많다. ‘라떼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도 같다. 1-2학년 때는 <에브리타임>에 들어가서 이런저런 정보를 얻었던 기억이 있는데, 복학하고 나서는 쳐다도 보지 않았다. 대충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에브리타임>에 혐오와 조롱, 폄훼가 난무해서 어떤 공론의 장으로 기능하지 않게 된 것이. 나임윤경 교수님의 강의가 정말 듣고 싶었다. 사실 사회학을 복수 전공하면서 또 4학년 때 문화인류학에 기웃거린 것은 나임 교수님 덕분도 있었는데 마침 2019년에 안식년이셔서 결국은 교수님의 강의를 듣지 못하고 대학 바깥으로 나오고야 말았다. 물론 정말 존경하는 김현미 교수님(선생님)의 강의도 듣지 못했고. 문화인류학과 대학원에 진학해서 두 교수님의 수업을 듣고자 했는데 두 번이나 면접까지 가놓고 떨어졌다. 그땐 두 번이나 떨어진 것이 창피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교수님들의 선택이 옳았던 것도 같다. 그래도 필드워크에 조장으로 참여하고 학부 강의도 듣고 했던 걸 좋게 봐주신 덕분에 두 번이나 면접까지 갈 수 있었다고, 지금은 감사할 따름이다. 아무튼, 그런 선망의 대상인 나임 교수님이 학생들과 쓴 책이라니. 너무나 읽고 싶었다. 실제로 수업을 들은 학생들이 <에브리타임>에 올린 글을 엮어 만든 책이라서 더 궁금했다. 내가 ‘진짜로’ 학교를 졸업한 이후의 학교가 궁금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다. 19년에 이미 <에브리타임>은 오염되고 있었는데 23년에는 얼마나 더 지저분할지. 수업에 참여한 학생들이 <에브리타임>에 글을 쓰면서 악의로 가득한 말에 큰 상처를 받진 않았을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읽을수록 그런 걱정은 서서히 누그러졌다. 아, 그래도 희망이 있구나. 이 책에 이름을 올린 학우들과, 같은 마음을 가진 다른 학우들과, 우리가 있구나. <사회문제와 공정>을 들은 학생들은 나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올곧고 단단한 마음의 심지를 갖고 있었다. 여성과 소수자, 장애인에 대한 혐오, 학벌주의, 기후위기 등의 의제에 대해 몇몇 사람들(주로 ‘이대남’들)은 ‘언더도그마’라고 말한다. PC주의라고 비아냥대기도 한다. 작금의 이런 혐오와 조롱, 멸시와 폄훼는 공정함, 냉철함, 객관성, 이런 말로 포장된다. 그렇지만 묻고 싶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외면하는 게 정말 공정한 것인가? 녹아내리는 지구를 못 본 척하는 게 정말 냉철한 일인가? 사회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정치적인 것이 왜 문제인가? 왜 공정하다는 말로 선하기를 거부하는가? 실제로 나임 교수님과 학생들은 <에브리타임>에 상주하는 듯한, 소위 말하는 ‘명문대’에 기껏 들어와 놓고 반지성주의로 열 손가락을 휘감은 이들에게 묻는다. 청소노동자를 고소한 연세대 학생들에게, 비건인 학우를 유난이라 말하는 학생에게, 여성혐오는 없다고 주장하는 남학생들에게. 윤석열은 탄핵되었지만 여전히 해결해야 할 일이 많다. 이준석은 이번 대선에서도 낮다고만은 볼 수 없는 지지율을 보였다. 더불어민주당은 다시 여당이 되었으나 차별금지법에 대해 회의적이다. 트럼프가 또다시 대통령이 되었고 이스라엘은 여전히 사람들을 학살하고 있다. 아직 전장연의 시위는 끝나지 않았고 여성들은 구조적으로 사회적으로 차별받고 이상 기후는 점점 빈번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퀴어 퍼레이드는 올해도 개최되었다. 고공 농성을 하던 노동자는 땅을 밟았고, 사람들의 죽음을 방관하던 대기업은 수색에 들어갔다. 여성, 성소수자, 나와 내 친구들은 여전히 잘 살아있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무지개의 끝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가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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