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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5

부활(톨스토이 문학전집 2)(반양장)
책
톨스토이가 이 작품으로 부활시킨 것은 네흘류도프와 카츄샤만이 아니었다. 그 시절 러시아와는 동떨어진,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나와 같은 사람도 이 책을 읽음으로써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일주일이 안 되는 시간 동안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네흘류도프와 카츄샤에 대한 나의 마음이, ‘범죄자’라고 불리는 이들과 모두가 우러러보는 명예와 권력을 가진 이들에 대한 나의 시선이 서서히 바뀌는 것을 느꼈다. 그중 가장 놀라웠던 것은 나의 분노와 증오도 사랑과 용서로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의 탄생이었다. 처음 나의 분노는 네흘류도프를 비롯한 남자들을 향했다. 카츄샤로 하여금 어려운 길을 걷게 만든 것은 네흘류도프와 다른 남자들이었다. 특히나 네흘류도프가 진심으로 그의 마음을, 몸을 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카츄샤는 타락(여전히 이 단어가 맞는진 모르겠지만)의 길을 걸었다. 그래서 괘씸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징역형을 기다리고 있는 카츄샤를 보고 나서야 자기 잘못을 깨닫다니. 그것도 자신은 떵떵거리며 배심원석에 앉아서. 당연히 카츄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카츄샤와 결혼하겠다는 다짐도 자의식과잉처럼 느껴졌다. 카츄샤의 지난날에 대한 보상으로 자신과의 결혼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으로 지난 세월과 그간 그가 받은 고통에 대한 보상이 완벽히 이루어지나? 그리고 카츄샤가 그걸 진정으로 원하는지 아닌지 어떻게 확신을 하나? 한참이나 고까운 눈으로 네흘류도프를 바라보았다. 변호사를 선임하고 이리저리 청원서를 쓰는 것이 카츄샤를 위한 척 시혜적으로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한 일로만 보였다. 그러나 네흘류도프는 카츄샤를 위해, 그리고 카츄샤와 함께 수감된 다른 이들을 위해 판사와 변호사 등 고위 관료들을 만나며 실제로 정말로 생각의 변화를 겪었다. 어느 순간 네흘류도프가 진심으로 변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사유재산, 특히나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그의 믿음으로부터 나온 행동-실제로 경작하는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는 것-을 보며 느꼈다. 물론 오랜 기간 사치스럽고 여유로운 생활을 해온 네흘류도프는 자신의 것이라 여기던 많은 것을 포기하는 게 정말 맞는 일인지 고민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면모가 오히려 네흘류도프가 ‘사람다운’ 사람임을 보여주는 지표처럼 여겨졌다. 카츄샤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맑은 그의 마음이 그의 깊은 곳에 살아 있으며, 다만 방탕하고 이기적인 생활 밑에 숨겨져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네흘류도프는 카츄샤를 위해 감옥의 안과 밖을 같은 시간 속에서 경험하며 사회의 부조리함을 깨닫는다. 그러한 깨달음이 가장 잘 드러난 부분은 배심원으로서의 둘째 날, 매트를 훔칠 수밖에 없던, 자신의 죄를 시인한 청년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였다. 230쪽에서 네흘류도프는 생각한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저 청년이 특별히 악한 사람이 아니라 가장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은 지극히 분명하다. 그리고 청년이 저런 사람이 된 것은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그런 사회적 환경에 놓였기 때문이다. 이런 청년이 사회에 생기지 않게 하려면 사람이 불행하게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사회적 환경을 먼저 없애는 것이 당연한 순리다. / 그런데 우리는 무얼 하고 있는가? 저런 청년과 같은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체포되지 않고 있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우연히 우리 손아귀에 들어온 저 청년만을 감옥에 처넣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게 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지극히 위험하고 의미 없는 일을 해야만 하는 환경으로 내몬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이와 같은 사회 구조의 병폐가 100년도 더 지난 한국에도 적용된다는 것에 통탄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렀음에도 다른 나라, 다른 사회에서 동일한 부조리가 발견된다면 이건 인간의 본성인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니 인간이 너무너무 미웠다. 증오스럽고 역겹기 짝이 없었다. 약하고 위기에 처한 사람들의 사정은 생각하지도 않고 무작정 손가락질하고 처벌하는 가장 보통의 사람들이 너무 끔찍했다. 231쪽에서 네흘류도프는 다시 생각한다. ‘만약 이런 사람들에게 주는 월급 중 단 100분의 1만이라도 사회에서 버림받은 존재들을 도와주는 데 돌리면 어떨까? 우리는 우리의 안전과 생활의 편리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노동과 용역을 제공하는 사람들로만 여기고 있는 이들을 도와주자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청년을….’ 작중 추후 카츄샤가 함께 지내게 된 정치범들 중 누군가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노동의 가치가 인정받아야 한다는 의견이 지지를 받는, 공평하고 평등한 세상을 위해 부유한 이가 그렇지 않은 이에게 나누는 것에 대한 언급이 금기시되지 않는 사회가 이 책의 배경이었던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오히려 10여 년 전보다도 이와 같은 생각이 억압받고 있는 걸 생각하면 참으로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 2025년에 ‘빨갱이’라는 단어가, 그것도 누군가를 조롱하고 낙인찍기 위해 사용되고 있을 수가 있지? 힘들게 삶을 영위하고 있는 타인을 위해 내가 가진 것을 나누자는 의견이 무슨 문제가 되지? ‘자유’라는 말에 지나치게 사로잡힌 이들이 자신의 자유를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 양 굴 때마다 지친다. 네흘류도프가 관리들, 판사와 검사, 변호사와 감옥 소장, 간수, 호송병들에게 느낀 역겨움을 나도 매일같이 느끼고 있었다. 다만 나는 권력보다도 인터넷에서 손가락을 놀리며 ‘자유로운’ 의견을 배설할 권리를 가진 이들 전반에 대한, 좀 더 폭넓은 혐오감에 심각하게 지친 상태였다. 네흘류도프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된 것은 이쯤부터였다. 257쪽의 서술은 꽤나 파격적이라 놀랐다. 글의 말미에 네흘류도프가 마태복음을 읽으며 그리스도를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고려했을 때 더욱 그랬다. 사실 이건 내가 종교 전반에, 특히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무지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감옥에서 죄수들을 모아 미사에 참석하게끔 하는 장면을 그리며 톨스토이는 말한다. ‘이 미사에 참석한 그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곳에서 이루어진 모든 일들이 사실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성 모독이며 조소를 퍼붓는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사제가 들고 들어와 사람들에게 입맞춤을 시킨, 끝에 칠보 구슬을 매달아 장식한 황금 도금의 십자가는 예수가 이곳에서 그의 이름으로 행해진 이 모든 일을 금지했다는 이유로 매달려 처형당한 처형대의 모양을 본뜬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굉장히 공감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당시 이런 서술이 이단적이라고 여겨지진 않았나 궁금했다. 러시아 정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적지만 당시 러시아의 많은 미사가 이처럼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을 때, 이는 미사를 진행하는 사제들 나아가 그들이 대변하는 종교, 러시아 정교의 전반적인 형식에 대한 도전이 아니었을까? 여기까지 쓰고 작가 연보를 보는데 아니나 다를까 1899년 장편 소설 <부활>을 발표하고 1901년 2월에 러시아 정교로부터 파문당했다고 적혀 있다. 아마 이 소설 덕분이었을 것 같다. 800여 쪽에 달하는 작가정신 출판의 <부활>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책의 3/4를 조금 넘긴 뒤에 나온다. 작열하는 7월, 이송을 위해 죄수들은 뙤약볕에서 몇 시간이고 걸어야 했다. 그 결과 가장 약한 이들 5명이 일사병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유형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감옥에서 나온지 하루도 되지 않아 비참하게 죽어버린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보고도 호송 장교, 간수장, 경찰, 경찰서장, 그리고 죄수들과 아주 먼 곳에서 이를 지시한 주지사까지 많은 이들이 아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그 무엇도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에 개탄하며 네흘류도프는 635쪽에서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비록 한 시간만이라도 그리고 아주 예외적인 어떤 한 경우에 국한된다고 할지라도 인간을 사랑하는 감정이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그러면 범죄가 없을 텐데.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죄를 짓고도 자기는 죄가 없다고 여기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을 텐데.’ 이미 여기서 네흘류도프는 부활을 예고하고 있었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사랑! 다른 이를 가엾게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하다면 범죄에 대한 선고도, 범죄도 없을 것이다. 심판받을 이도 심판할 이와 동등한 인간임을 안다면, 그러므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심판할 권리가 없음을 깨닫는다면! 어째서 누군가는 남들보다 돈이, 땅이 많다는 이유로 그들 위에 군림하는가? 돈과 땅이 있으면 권력이, 또 권력이 있으면 돈과 땅이 생긴다는 걸 아는 사람들은 욕심내는 것을 멈추지 못하고 더욱 긁어모으려고 한다. 그럴수록 가진 이는 더 갖게 되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더 가난해진다. 그리고 가진 이의 그렇지 못한 이에 대한 착취도 점점 더 당연한 것이 된다. 이게 다 욕심 때문이다. 그렇다면 욕심을 내지 못하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소유할 수 없게, 토지라든가 하는 것을 소유할 수 없게 한다면… 그 무엇을 한계 짓지도 그 무엇으로부터 한정 받지도 않는 그 노인처럼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쓰고 보니 아직 나는 분노 대신 사랑을, 증오 대신 용서를 실천할 준비가 안 된 것도 같다. 깨달음과 행동하는 것은 역시 많이 다르구나. 반성 또 반성. 비록 네흘류도프는 카츄샤와의 결혼이라는 맨 처음의 목표를 이루진 못했다. 카츄샤 역시 네흘류도프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음에도 그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시몬손을 택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라는 타인을 위한 변화가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변화를 겪었다. 그리고 부활했다.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네흘류도프는 카츄샤와 결혼하지 못했으나 좌절하지 않았다. 대신 카츄샤와의 재회, 그리고 그 이후로 겪고 깨달은 모든 것으로부터 더 많은 사람을, 가장 인간다운 인간들을 위하고 사랑할 미래를 향해 나아가며 이야기가 끝이 난다. 책은 여기서 끝났지만 네흘류도프의 삶은 이제 다시 시작이라는 것을 안다. 카츄샤도 그렇다. 그리고 나도, 이 책을 통해 부활을 겪은 나 역시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준비가 된 것 같다. 사랑으로 가득한 새로운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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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호의 악몽 2
책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으면서 다 읽은 책은 진짜 오랜만이다. 아니 처음인가? 오늘까지 반납이어서 그랬던 것도 있지만 탐험대가 테러 호를 떠나 킹윌리엄 섬에서 행군하다가 흩어진 부분부터는 진짜 정신을 못 차리고 읽었다. 크로지어가 벙어리 여자를 만난 이후부터는 실제로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여자가 툰바크와 치룬 것과 같은 의식을 치룬 뒤 탈리릭투그는 여자의 남편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어릴 적 메모 모이라 할머니와의 기억에서 늘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흰 옷을 입은 사제가 아닌 하얀 털로 뒤덮인 툰바크에게 자신을 바치는 장면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떠내려온 테러 호에 깃든 악한 이누아를 알고 미련 없이 배에 불을 지른 장면도 좋았다. 크루지어로 살아온 삶은 가슴에 넣어두고, 탈리릭투그로 또 다른 삶을 살아갈 준비가 된 것 같아서. 2권 후반부에 나오는 세드나는 이누이트 족에서 가장 유명한 신이다. 이전에 읽은 책에서 천문학자가 자신이 발견한 별에 세드나의 이름을 붙였기에 나도 대강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자른 세드나의 손가락에서 고래와 바다표범, 바다코끼리가 탄생했다. 그리고 세드나는 바다의 영혼이 되었다. 새로이 알게 된, 그리고 이 책 전반과 관련이 있는 이누이트 설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세드나가 만든 툰바크는 그의 통제를 벗어났다. ‘진짜 사람들’ 이누이트의 주술사들은 최고의 남녀 주술사들로부터 ‘시샴 이에우아’를 탄생시켜 툰바크와 소통하게 했다. 이리버스와 테러 호의 선원들이 벙어리 여자라고 부른 실나는 시샴 이에우아였다. 괴물 툰바크와 소통했고, 크로지어가 천리안을 가진 것을 알았다. 그리고 언젠가 같은 시샴 이에우아가 될 것을 알았다. 크로지어가 탈리릭투그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은 운명이었다. 그 운명을 알고 있던 것은 실나뿐이었지만. 실나가 말 대신 생각으로 전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해 크로지어는 그렇게 먼 길을 돌아왔던 것이다. 크로지어도 실제 인물이었다. 실제로 두 배가 실종된 지 거의 10년 뒤 이누이트 마을에서 그가 목격되었다고 했다. 이 책은 존 프랭클린보다 그에게 초점을 맞추어 쓰였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알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나는 정말 크로지어가 탈리릭투그든 다른 무엇이 되었든 이누이트 마을에서 고통 없이 지내다가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정말 재미있게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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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의 딸(하)
책
중국 근현대사에 관심을 갖게 된 20대 초 이후, 나는 중국이라는 나라와 중국 사람들, 그리고 공산주의와 공산당에 대해 편협한 시각을 갖지 않으려 무진장 노력을 해왔다. 그때는 지금처럼 한국 내 중국에 대한 혐오가 만연해지기 전이었기에 그러한 나의 노력은 큰 방해를 받지 않았다. 물론 언론에서는 조선족과 중국인에 의한 범죄가 과장되어 보도되는 경향이 있었으나, 다행스럽게도 그런 내용을 얼추 걸러 들을 수 있는 수준이었기에 내게 큰 영향을 주진 못했다. 내가 중국 근현대사에 관심을 보이게 된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은 <백 사람의 십 년>이라는 책이었다. 대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그 책은 내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백 사람의 십 년>은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중국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들을 수집한 것인데, 그동안 중국 내 수많은 사람이 명예를 잃고 가족을 잃었으며 생명까지 잃었다고 했다. 그것도 다른 외부 요인이 아니라 자신의 국가에 의해서. 너무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았으며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인간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어리석을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나름의 편견을 내려놓았다고 여겼는데, 이는 내가 가져온 중국에 대한 선입견이 ‘선입견’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그 뒤로도 나는 꾸준히 중국에 관심을 가졌다. 막 학기에는 중국과 북한 사람들, 재일교포에 대한 강의도 수강해 열심히 들었다. 코로나 시대를 지나며 나날이 중국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반감은 심해져만 갔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은 혐오 발언과 행위도 있었다. 그럴수록 중국에 대한 나의 마음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그리고 더욱 궁금해졌다. 한국에서 현대 중국이 가진 이미지는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 이웃 나라인 중국에 대해 우리가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이고,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은 무얼까? 나는 내가 제일 잘하는 것, 책을 읽음으로써 이를 해소하고자 했다. 올해 읽은 중국에 관한 책으로써는 세 권째에 해당하는 <대륙의 딸>. 이전에 읽은 두 권은 중국 역사와 철학에 대한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실제 중국에서의 삶을 기록한 자전적인 이야기책이었다. 심지어 청 말기부터 살아온 외할머니부터 어머니, 자신까지 3대에 걸쳐 이어지는 중국 여성들의 인생에 대한 일종의 회고록이었다. 상권에서 외할머니와 젊은 어머니의 삶을 다루었다면 이번 하권에서는 어머니와 젊은 글쓴이의 삶이 다루어졌다. 하권에서는 내가 중국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한 ‘문화대혁명’ 시절에 대한 글쓴이 가족의 기억이 담겨있었다. 공산당에 모든 삶을 바친 어머니와 아버지가 구금당하고, 폭력과 고문에 시달리고, 심지어 강제노동 수용소에 들어갔을 때는 마치 내 부모가 그런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마음이 찢어졌다. 가족들이 갈래갈래 떨어져 사는 시절에 대한 기록도, 외할머니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담담한 서술도 정말 내가 겪은 일처럼 숨도 못 쉬게 슬펐다. 한편 슬픔과 괴로움 속에서도 아름다움과 위안을 찾던 소녀 시절의 글쓴이에게는 연민을 느꼈고, 마오쩌둥 사후 중국에 자유의 바람이 불었을 때 글쓴이가 대학에 가고 하고 싶던 공부를 하는 부분을 읽으며 뛸 것처럼 기뻤다. 그밖에도 나는 글쓴이의 크고 작은 즐거움과 슬픔, 외로움을 함께 나누었다. 두 권으로 쪼개진 책을 읽는 내내 내가 글쓴이였고 글쓴이가 나였으며, 글쓴이의 부모를 내 부모처럼 공경하고 사랑했다. 이 책도 <백 사람의 십 년>처럼 중국 근현대의 어두운 면을 낱낱이 파헤쳤다. 공산당이 최초에 만인의 평등이라는 위대한 가치로 시작한 것은 맞지만 국민당이 그랬듯이, 또 모든 사상이 그렇듯이 점점 본래의 거룩한 목표는 희석되고 권력에 대한 야욕만 남았다. 마오쩌둥과 그의 부인 장칭을 비롯한 4인방은 자신들의 지위를 위해 중국의 인민들을 잔인하게 학대했고, 그것도 모자라 그들의 도덕성과 지성마저 상실케 했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우울하다고도 할 수 있는 지점을 살아가면서 글쓴이와 가족들, 그리고 수많은 중국 인민들이 겪었을 마음에 미약하게나마 공감하는 것은 괴로운 경험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런 상황 속에도 가족을 위하고 아끼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은 변치 않을 수 있음을 발견한 것은 참으로 소중한 경험이었다. 책을 읽는 것은 늘 즐거운 일이다. 내가 이런 책을 알아내고 열렬히 읽을 수 있어서 정말로 다행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을 수많은 독자에게, 나에게 기꺼이 내어준 글쓴이에게 진심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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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토피아 2
영화 / TV
내가 이걸 보려고 20대를 살아냈구나…. 10년을 기다린 게 아깝지 않을 정도로 너무너무 좋았다. 주디 홉스와 니콜라스 와일드가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상대임을 닉도 알고 주디도 알고 우리 관객들도 알게 해준 2편 정말 감동 그 자체였다. 사랑이 뭘까? 고개를 들어 닉주디를 보게 하라…. 1편에서는 사랑일 듯 우정일 듯 긴가민가한 닉과 주디의 관계가 차곡차곡 쌓여갔다면 이번 2편에서는 둘의 관계가 단순 우정은 아님을 보여주는 데 큰 의의가 있었다. 허니문 산장으로 올라가는 길부터 본격적으로 둘의 관계가 우정 이상임이 드러나는데, 주디가 선물로 준 볼펜을 실수로 떨어뜨려 박살이 나자 둘의 관계에도 균열이 생겼다. 주디는 속상해서 아무 말도 안 하고 계속 암벽을 타고 올라가기만 했고 닉도 그랬다. 그런데 그런 닉의 침묵이 단순히 미안함에서 오는 게 아닌 게 보여서 나는 너무 심란했다…. 그런데 산장에서 서로 마음 터놓고 이야기도 못 하고 헤어지게 되어서 정말 머리를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전개상 엔딩에서는 둘 다 살아서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파트너라고 얘기하겠지! 그렇지만 둘은 그걸 몰랐을 거고 주디는 닉이 잡혀갔을 줄만 알았을 거고 닉은 주디의 생사도 모르고 걱정했을 거고… 정신병이 온다는 너무 수동적이다. 내가 정신병에게로 간다(당사자성 발언). 그렇게 아무 말도 못 하고 산장에서 헤어진 이후 한참이 지나서야 둘은 솔직한 마음을 말할 수 있었다. 닉이 해독펜을 던져 주디를 살리고 주디가 떨어지는 닉의 손을 잡아서 살린 이후에. 서로 생사도 확인하지 못하고 떨어져 있는 동안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 모든 일이 다 끝나고 닉도 주디도 횡설수설하면서 그제야 진짜 자기 마음을, 네가 내겐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고백하는데 어떻게 눈물이 안 나냐고…. 닉주디 관계성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이면 엉 하고 울어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상영관에서 나만 울었다고 하지? 진짜 아 도저히 안 되겠다 둘이 빨리 결혼해라 애초에 둘이 서로 상처 주고 상처받은 이유가 너무 다른 둘이 서로를 너무 아끼고 사랑해서라는 게… 벅차기도 하고 이해가 가기도 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해내고야 마는 정의로운 주디와 되도록 쉽게 살고 싶은 닉이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갈등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1편 볼 때는 주디의 시선으로 닉을 봤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자꾸만 닉의 시선에서 주디를 보게 되었다. 어른이 된 걸까? 나이가 들면서 점점 주디보다는 닉에 가까워지는 내가 아쉬웠다. 그렇지만 닉이 주디를 보는 것처럼 나도 조금 어렸던 나를 되돌아볼 순 있었다. 다만 닉은 주디가 행여나 다칠까 걱정했고 나는 20대 초반의 나를 보며 좀 안타까운 것도 같다고 생각했다. 게리의 가족은 뱀이라는 이유로 당연하다는 듯이 누명을 썼고 너무 쉽게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나아가서는 모든 파충류가 포유류를 비롯한 동물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게 되었다. 동물들의 유토피아를 자처하는 주토피아가 “모든” 동물을 위한 곳은 아니었다는 게 인간들이 살아가는 사회랑 다를 바가 없어서 화가 났다.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와 자유를 준다고 믿는 현대의 체제가 정말로 공정과 평등을 보장하고 있나? 이제는 아닌 척하지도 않고 경쟁을 부추기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먼저 배척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은 자명하지 않나? 그리고 그들이 누구인지도. 마침내 기후 장벽을 만든 것이 게리의 할머니임이 밝혀지고, 원래 그들이 살던 곳으로 돌아왔을 때 뱀들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그 긴 세월을 버티고 견뎌 왔음에도 모두 주디를 안아주고 싶어 해서 또 한 번 울컥했던 것 같다. 링슬리 가족을 보면서는 괜히 팔레스타인 생각이 났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링슬리 가족처럼 귀여운 고양잇과(찾아보니 캐나다? 스라소니란다)도 아니면서 왜 난리지… 너네 뭐 되냐고. 링슬리 가족 중 유일한 순딩이 포버트를 보면서는 참 마음이 안 좋았다. 게리를 배신한 것도 이해가 가고… 게리도 왠지 이해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가족의 인정과 사랑은 누구든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거니까. 그냥 불쌍하고 안타까웠다. 그래도 안 죽고 차라리 감옥에 가서 다행이었다. 마지막에 아버지한테 파트너십에 관한 책 보여주는데 짠하고 귀엽고. 살모사 게리가 눈밭의 추위에 다 죽어가면서도 주디에게 우리는 성공할 거라고 계속 그럴 때… 처음에는 무슨 소리야! 지금 너 다 죽어가잖아ㅠㅠ 싶었는데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냥 그런 믿음 자체가 너무 눈물이 났다. 얼마나 복잡한 마음이었을까…. 내가 게리에게 Permission to hug 받아서 꼬오오오옥 안아주고 싶다…. 주토피아 최고의 디바 가젤 언니 사랑해요 3편 무조건 나올 것이고 이스터에그처럼 숨겨둔 쪽지에서 확인할 수 있던 것처럼 그리고 쿠키에서 깃털이 떨어진 것에서 알 수 있었던 것처럼 새들이 나올 텐데 과연 또 어떤 이야기를 풀어갈지 기대가 된다. 동물들로 우리 인간 사회의 문제점을 꼬집고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작품은 언제나 사랑스럽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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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드
영화 / TV
아름다운 우정.. 아름다운 노래... 아름다운 여자들까지 삼박자가 완벽한 영화 사실 defying gravity가 위키드 넘버인 건 얼마 전에 알았는데 너무너무 엘파바를 위한 노래였다고 느꼈다!! 미드 glee에서도 학교에서 소외된 아이들이 부른 노래였는데 엘파바가 부르는 걸 보고 정말 깊은 울림을 받았음,, 신시아 에리보의 목소리가 너무 아름다웠고 아리아나 그란데와 합도 잘맞았당 엘파바는 사람들의 눈총이 아닌 사랑을 받고 싶었음에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다 내던질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캐릭터였다 그래서 엘파바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음! 글린다는 정말 통통 튀고 사랑스럽고 깜찍한 캐릭터였는데 아리아나 그란데가 정말 잘 소화해냈다 둘의 우정이 정말정말 아름다웠고 나도 친구들에게 때론 엘파바로 때론 글린다로 곁에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ㅠㅠ 내년에 파트 2 개봉한다는데 빨리 부탁드림다 + 25/01/04 곱씹을수록 최고의 영화.. Defying gravity 한곡재생하다가 5점으로 바꿨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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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4.7

위키드: 포 굿
영화 / TV
2025년의 첫 곡으로 Defying Gravity를 들은 것이 기억난다. 엘파바 같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서. 모두가 미워하고 손가락질 하더라도 옳은 일을 하기 위해서라면 중력도 거스르는 그런, 엘파바처럼 단단한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한 해를 어쩌면 그 이상을 살고 싶어서. 2025년을 한 달 남긴 지금, 뒤돌아보면 나는 그렇게 지내왔을까? 오즈의 거짓말에 배신감을 느끼고 사랑하는 피예로를 뒤로 한 채 날아오른 엘파바는 정말로 사람들이 말하는 나쁜 서쪽 마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때 글린다가 아니었더라면 엘파바는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글린다가 엘파바 덕분에 자신이 진정으로 좋은 사람이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는 순간, 엘파바 역시 글린다 덕분에 더 단단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엘파바에게 옳다고 믿는 일을 끝까지 해낼 용기를 준 것은 글린다였고 글린다에게 진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준 것이 엘파바였다. 물론 엘파바와 피예로가 살아 있다는 걸 알렸다면 글린다는 크게 기뻐했겠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 글린다가 앞으로는 이전과 조금 다른 삶을, 더 나은 삶을 살아갈 걸 알았기 때문에 엘파바는 피예로와 함께 오즈를 뒤로 한 채 떠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피예로의 마음이 엘파바에게 가있는 걸 알고 나서 글린다가 부르는 I’m Not That Girl은 엘파바가 1편에서 부르는 것보다 더 쓸쓸하게 느껴졌다. 엘파바가 부를 때는 기대조차 없었지만 글린다는 피예로와 결혼하기 일보 직전이었어서 더 그랬을까. 모두의 사랑을 받지만 자신이 사랑한 사람에게만은 사랑받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슬플지는 차마 짐작이 가지 않는다. 다만 그럼에도 엘파바와 몸싸움 한 번 하고는 다시 친구로 돌아간 글린다를 사랑하지 않을 수 사람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예로 캐릭터는 사실 1편에서 등장 때부터 조금 의문이 있긴 했는데 이번에 엘파바를 위하는 걸 보고 마음이 바뀌었다. 엘파바와 글린다가 행복만 하길… 기분이다! 피예로 너도 행복해라! 오즈 아저씨 너는 행복하지 마세요. 1년이라는 긴 인터미션 이후 본 <위키드 : 포 굿>은 1편 같은 강렬한 충격과 여운은 없었더라도 감동적인 마무리였다. 정말 아름다운 우정과 사랑 이야기였다. 위키드 뮤지컬도 보고 싶어졌고 오즈의 마법사 책도 다시 읽고 싶어졌다. 오즈의 마법사 영화는 아직 못 봤는데 그것도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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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호의 악몽 1
책
아니 수요일까지 반납이라 약간 마음이 급하긴 했는데… 읽을수록 더 재미있어서 어빙이 에스키모 여자와 괴물을 목격한 이후로는 진짜 정신도 못 차리고 후루룩 읽었다.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12시 넘은 지금까지 그냥 완독해버렸다. 한참 전에 읽을 책 목록에 올려놓은 책인데 이제야 읽다니. 물론 평교에 없었어서 그랬지만. 그래도 지금이라도 읽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진심으로. 크로지어는 모르겠지만, 존 프랭클린은 실존 인물이었던 것 같다. 책은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기묘하게 섞어 놓았다. 크로지어가 천리안으로 본 것 중에는 실제 미국에서 심령 현상의 목격자로 유명했던 폭스 자매도 있었다. 마지막에 해리 페글러와 그의 스승이자 전 애인인 브리젠스는 추후 다윈의 <종의 기원>이 나올 것에 대한 소문을 언급한다. 글쓴이는 존 프랭클린이 괴물에게 죽임을 당한 이후, 그의 아내 제인이 돌아오지 않는 이리버스 호와 테러 호를 찾을 것을 촉구하는 게 실제로 일어났던 일임을 넌지시 알려준다. 크리스마스와 새해쯤, 크로지어를 분노하게 하고 또 괴물에게 큰 만찬을 제공한 카니발은 두 배가 북극으로 떠나기 전 발표된 에드거 앨런 포의 <붉은 죽음의 가면극>을 모티프로 삼았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또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작가의 상상인지는 잘 모른다. 북극 탐험의 역사에 대한 나의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글쓴이가 정말 교묘하게(p) 글을 잘 썼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무튼 포의 단편이나 <종의 기원> 이야기는 저작의 이름이 나오기도 전에 알아챌 수 있어서 즐거웠다. 몰랐다면 이렇게까지 재밌게 읽지는 못했을 것이다. 2권도 1권 정도로 두꺼운 것 같던데, 금방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 괴물과 에스키모의 정체는 무엇인지, 이리버스와 테러 호, 크로지어 함장과 다른 승조원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지 정말 궁금하다. 내일 출근만 아니었어도 2권을 시작하고 잘 텐데! 자야 해서 다음 권을 읽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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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의 딸(상)
책
글쓴이의 외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글쓴이의 삶은 조각조각 이어붙인 퀼트 작품처럼 전부 다 달라 보이다가도 근현대 중국의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유기적으로 이어졌다. 먼저 읽은 (상)권은 글쓴이의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삶에 대한 것이었다. 글쓴이의 외할머니는 청 말기에 장군의 첩이 되어 쉽지만은 않은 인생을 살았다. 하나뿐인 딸을 비롯하여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많은 슬픔과 아픔을 견디어 냈다. 한편으로는 진정한 사랑을 위해 당시 통념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던 재혼을 하기도 하는 등 진취적인 면모를 지니기도 한 사람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외할머니는 새로운 혁명적 가치를 받아들이기보다는 중국의 전통적 가치에 미련을 둔 낡은 인물로 보이기도 했으나, 그럼에도 그가 자신과 딸의 삶을 위해 내린 결정은 당시 여성으로서는 매우 대담한 것이었다. 반면 어머니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중국의 패권을 두고 싸우던 시기에 열정적인 공산당원으로 젊은 시절을 보냈다. 공산주의적 가치, 특히 여성도 남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에 크게 감명한 그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전부 내던질 정도로 혁명에 열의를 보였다. 자신과 다른 가족들보다도 공산주의 이념을 우선시하는 남편에게 서운하고 화가 날 때도, 당의 지침에 의아함을 느낄 때도, 애써 그것이 더 나은 중국의 미래를 위한다고 자신을 다독였다. 당으로부터 공산당에 바친 지난 삶을 끊임없이 의심받고, 아이를 유산해 몸과 마음이 상했을 때도 그는 모두 참고 견뎠다. 그러나 마오쩌둥이 무리하게 추진한 대약진운동과 대기근을 지나며 어머니는 당 활동에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게 진정으로 옳은 것일까? 그 누구보다 굳은 심지를 갖고 가족들에게마저 예외를 두지 않던 아버지도 무언가 옳지 않다고 느꼈다. 글쓴이는 공산당이 집권한 뒤 대기근이 지나고 혁명의 열기가 식어갈 때쯤 유복한 어린 나날을 지내고 있었다. (상)권에서 글쓴이와 형제들은 아직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글쓴이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트인 상태였으며 당원인 부모님 덕에 좋은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사는 것을 부끄러워 하는 어린이였다. 마오쩌둥과 당에 대한 마음이 식은 공산당원 부모님 밑에서 점점 개방되는 중국을 경험한 그가 (하)권에서는 어떤 마음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지 정말 궁금하다. 비록 이 책이 모든 중국인의 삶을 재현해냈다고는 보기 어렵겠지만, 그럼에도 매우 큰 가치가 있는 자전적 글이라는 데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근현대 중국에 관심 많은 나에게는 특히나 정말 유의미한 책이다. 다만 이 책으로 얻은 인사이트가 또 다른 편견이나 선입견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언제나 지금과 같은 마음을 견지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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