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공개 ・ 07.14

2026.07.13 (Mon)
무한한 시공간 속에서 그 무엇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와 나의 존재는 나의 삶은 찰나였고 보잘것없다는 말보다도 덧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인류 전체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인류가 아무것도 아니었고 삼체인들이 아무것도 아니었고 지구를 비롯한 모든 곳에서의 모든 문명이 아무것도 아니었다.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우주의 수많은 문명 수많은 생명체가 존재했고 멸망했을 시간선 속에 우리는 무엇이었고 무엇일까? 나는 감히 우주를 연구하다 깨달음을 얻고 죽어버린 천문학자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책을 다 읽고 난 뒤 한참을 공허함 속을 헤매는데 문득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너무 외로웠다. 저 멀리 어느 별도 이만큼 외롭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 책을 읽기 전과는 차원이 다른 외로움이 밀려왔다. 절대 그 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는 생각을 얼마 전에도 했던 것 같은데, 어째서 같은 시기에 두 작품을 함께 접하게 되었을까? 나는 헤어질 준비를 하던 우울과 다시 볼을 맞대는 기분이었다. 세상에 둘만 남은 청신과 관이판처럼, 이 책을 읽고 난 후 내게는 나와 내 우울한 마음 우리 둘만 남아버렸다. 끝없는 우주에 우리뿐일 리 없다는 생각은 언제나 하고 있었다. 바깥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은 언제나 마음 한켠을 차지했지만 그게 내 전부였던 적은 없었다. 머리가 커갈수록 바깥 세계보다는 깊고 좁고 작은 세계가 궁금했다. 나는 광활한 세상으로 나가는 대신 점점 더 안으로 안으로 파고들었다. 물론 종종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날도 있었지만 잠깐뿐이었다. 나는 안일하게도 인간의 생각과 인간의 마음만이 궁금했다. 이기적이게도 그중에서도 내 마음과 생각과 감정이 가장 궁금했고 20대 내내 그것에만 몰두해 지냈다. 몰두했다고 하기엔 부끄러운 시간을 한참 보낸 뒤 나는 그래도 내 마음의 보석을 하나 찾을 수 있었다. 사랑…이라고. 너무 흔하고 너무 뻔하고 너무 거창하지만 나를 지탱해줄 수 있는 것을 찾아 죽지 않을 결심이 설 수 있었다. 3부의 주인공인 청신도 그랬다. 청신은 사랑으로 버텼다. 1890만 년이 지난 뒤에도 그가 버틸 수 있던 것은 사랑 때문이었다. 청신은 인류를 사랑했고 윈톈밍을 AA를 사랑했다. 웨이드도 사랑했을 것이고 관이판과 지자도 사랑했을 것이다. 기어코 안전한 소우주를 떠나 대우주로 회귀하는 결정을 내린 것도 모두 사랑 때문이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알지 못하는 어떤 누군가를, 끝이 보이지 않는 시공간을 함께 공유한다는 이유만으로 사랑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청신을 나도 사랑했다. 그래서 그의 끝없는 생존이 너무 괴로웠다. 청신은 끊임없이 살아가며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잃어야 했다. 부모님, 윈톈밍, 지구와 인류 문명, AA와 다시 윈톈밍까지. 지나친 사랑의 대가가 이렇게 끔찍한 것이라면 어째서 우리는 나는 사랑을 하도록 태어난 걸까? 하지만 그럼에도 사랑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음을 알고 있다…. 아마 청신도 그랬겠지. 청신의 사랑과 관련해서 인상 깊었던 구절이 몇 개 있었다. 간만에 좋아하는 문장에 인덱스를 붙여가며 책을 읽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는데, 무려 5개나 된다. 청신이 나와 유사한 가치관을 공유할 지도 모르겠다는 걸 깨달은 건 179쪽에서였다. “그날 밤 청신은 부모님 집 밖에서 날이 밝을 때까지 서 있었다. 밤바람이 불고 별이 반짝일 때마다 엄마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 3세기 뒤 그녀는 마침내 사랑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받은 사랑으로부터 사랑의 소중함을 알고, 그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마음과 결심을 가진 청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신만큼이나 사랑했던 인물 중 하나는 호주의 프레스 노인이었다. 여린 마음을 가진 청신에게 “얘야,” 하고 불러주던 첫 어른이었다. 프레스 앞에서 청신은 지구의 운명을 뒤바꾼 검잡이가 아니었다. 내내 그 일에 대해 말하지 않던 프레스는 244쪽에서 처음으로 청신의 결정에 대해 말을 건넸다. “그가 청신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 “하지만 네 탓이 아니야. 정말로 네 탓이 아니야.”” 프레스에게 이 말을 들은 다음 날, 청신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웨이드를 찾아가고 먼 훗날 헤일로 그룹을 그에게 넘긴다. 모두가 청신을 탓하던 그때, 프레스가 보여준 이해와 사랑은 청신을 타고 웨이드에게까지 전해졌다. 그 결과로 청신은 2차원으로 접히던 태양계를 탈출한 유일한(물론 AA도 함께였다) 사람이 되었다. 1890만 년이라는 시간을 넘어 자신이 간직한 사랑을 우주에 전할 기회를 가진 인류가 되었다. 물론 전 인류를 뒤로한 채 곡률 추진 엔진이 탑재된 광속 우주선을 타고 떠나던 705쪽의 청신은 사랑을 원망했다. “그녀는 결국 두 번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 두 번 모두 그녀에게 신에 버금가는 권력이 쥐여졌지만 그녀는 사랑의 이름으로 인류 세계를 나락으로 밀어 넣었다.…” 사랑의 이름으로! 내가 정말 좋아하는 말이다. 사랑의 이름으로… 아무리 생각해봐도 <삼체>와 <진격의 거인>은 유사한 맥락을 지닌다. 존재와 멸망과 사랑을 다룬다는 점이 가장 그렇고 또 여러모로…. 755쪽에서는 단기(일줄 알았던) 동면에 들어가기 전 관이판이 청신에게 말한다. ““그 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박사님에겐 잘못이 없다고 믿어요. 사랑은 잘못이 아니에요. 누구도 한 세계를 멸망시킬 순 없어요.…”” 사랑은 잘못이 아니라는 말은 청신에게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많은 위안이 되었다. 언제나 너무 사랑한 것을 후회하는 나에게도, 내 마음은 잘못이 없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그리고 나는 또 이 문장을 읽자마자 관이판이라는 인물을 사랑하게 되었다. 너무너무 뻔하게도. 인덱스를 붙인 문장 중 유일하게 사랑과 관련되지 않은 것은 646쪽이었다. 지도교수였던 딩이에 대한 꿈을 꾼 뒤 Ice는 깨닫는다. “생존을 가로막는 건 무능과 무지가 아니라 오만이다.” 그러나 그가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한참 전에 딩이는 깨달았고, 양둥은 그보다도 한참 전에 깨닫고 가장 먼저 죽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럼에도 Ice와 바실리, 레벌레이션호의 모든 승선원이 기꺼이 2차원화를 받아들인 것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멸망 앞에서 처절하게 탈출하고자 하는 몸부림에 대한 묘사를 볼 때마다 괴로웠기 때문이었다. 괴로움의 원인은 안타까움에 있었다. 사실 나는 생존에 대한 욕구? 본능?이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특히나 피할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죽음 앞에서는. 2차원화를 피하고자 우주선을 타고 떠나는 이들을 묘사한 문장들 위로 땅울림을 피해 달리지만 결국 거인들에게 밟혀 죽는 캐릭터들의 모습이 겹쳤다. 나는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지만… 그뿐이었다. 그뿐이다. 붙였던 인덱스를 모두 떼어내고 책장을 덮은 뒤 나는 다시 공허로 돌아왔다. 여전히 이 시공간 속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의 생각도 걱정도 고민도 행복도 불행도 내 삶도 모두 찰나일 것이다. 나는 청신이 아니고 청신 같은 평범하지만 위대한 인물도 될 수 없기에 내가 가진 사랑이 시간을 넘고 공간을 초월해서 퍼져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이 덧없는 존재의 덧없는 삶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금 당장 내릴 수 있는 답은 하나밖에 없다. 그냥, 주어진 시간을 살아가는 것. 내가 지나쳐가는 이 시공간 속에서 그냥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 그렇지만 나와 함께 찰나를 살아가는 이들을 사랑하는 것.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일 것이다. 사랑의 이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