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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7.04 (Sat)
지금보다 조금 어릴적에,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라는 서정주의 문장을 처음 읽고, 치기어린 내가 떠올린 건 ‘나 또한 그렇다’ 라는 오만하고 미숙한 발상이었다. 나는 아주 어릴적부터 부모 내지 가족과 물과 기름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던 아이였다. 부모는 내가 일찍이 자기만의 세계를 갖춰서, 끼어들기 어려웠다고 했다. 무언가를 지시하면 대충 알겠다고 대답하고, 종종 거짓말을 하고, 혼나면 울고, 금방 용서받고, 먼저 진심을 내보이지 않는 아이. 그저그런 데면데면한 사이. 그러면서도 부모는 나에게 있어 깊이 원망하고 깊이 미안해하고 깊이 사랑하는 존재다. 어쩌면 내 곁에 있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기에 소중함을 몰랐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며칠 전에 동생과 저녁을 먹고 버스에 올라서 나눈 대화도 생각난다. “할머니를 좀 더 자주 찾아뵈어야 할까?” “왜?”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아서.” “근데 언니는 그러지 않아도 후회할 것 같긴 해.” 동생은 할머니들을 나보다 더 살뜰히 챙긴다. 참 자주 찾아뵙는다. 그것이 일종의 안쓰러움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나는 안다. 정작 할머니들이 해준 밥은 내가 훨씬 더 많이 먹었는데. 나의 유년은 외할머니 손에 맡겨졌고, 동생은 엄마가 키웠다. 주말이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오셔서 사과잼 와플을 손에 들려주고, 신림동 집으로 데려갔다. 그런데 나는 이제 할머니가 계신 신림동에도 자주 가지 않고, 외할머니가 계신 요양원에도 뜸하게 방문한다. 기껏해야 어색하게 웃으며 밥 한 끼 먹자고 하루를 소진하기엔 주말은 너무 짧고 소중했으니까. 후회하게 되려나. 나는 그 후회가 아주 늦게 찾아오면 좋겠다. 만날 때마다 작아지는 할머니들의 몸을 보면 덜컥 겁이 난다. 어쩔 줄을 모르겠다. 그게 싫어서 피하는 걸까. 그러다 영영 후회하게 되면 어쩌지. 당신은 아직도 나를 보면 내가 유모차에 있을 때, 그 작고 예쁜 얼굴이 당신의 자랑거리였다는 얘기를 한다. 기억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바래지 않는 애정에 놀라면서도 나는 멋쩍게 웃기만 한다. 사랑받는 것에 너무 익숙해서, 사랑받는데에 서툰 내가 원망스럽다. 와중에 2년간 시를 놓았다가 다시 처음 쓴 시에는 아이와 할머니가 나온다. 책을 읽으면서 정말 많이 울었다. 내가 받은 어마어마한 사랑이 두려워서. 이 책을 구매했을 적에, 자리에 계시던 작가님에게 싸인을 받았다. 계획에 없던 우연이었고, 그래서 더 기뻤다. 작가님은 시를 쓴다는 나의 말에 내 손을 꼭 잡아주시며 응원해주셨다. 그때 그 손의 온기가 이상하리만치 지워지지 않는다. 지금도 내 손에 남아서 나를 지켜주는 것만 같다. 나는 그저 지나가던 독자일 뿐인데. 잘 아는 사이도 아닌데. 말주변도 없는데 긴장까지 해서 얼어있던 나에게 그렇게 따뜻한 손과 말을 선뜻 내밀다니. 그저 기쁜 순간으로 지나갈 줄 알았는데, 이렇게 오래 따뜻할 일인가. 신기했다. 그렇게 의아한 마음이 들 정도로 여운이 남아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 알았다. 작가님의 선한 눈매와 따뜻한 손은 누군가의 사랑으로 빚어졌다는 걸. 본인이 받아온 무수한 사랑을 기꺼이 헤아리는 사람은 정말 아름답구나. 작가님이 쓴 두 권의 시집과 한 권의 산문집을 모두 읽고, 나는 사랑을 좀 더 배웠다. 사랑받는 사람의 자세를 배웠다. 휘청이는 몸짓이 너무 부끄러웠다. 고해하듯 꿇어 앉아 묻고 싶어지기도 했다. 저는 저밖에 모르는 이기심으로 똘똘 뭉치고, 그 많은 사랑을 받고도 못 받은 척 우기는 사람인데, 이런 저도 시를 쓸 수 있나요? 저에게 시를 만날 자격이 있을까요? 작가님은 ‘나’를 버리고나서 작가가 될 수 있었다는데… 나도 그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엉엉 울었다. 읽는 내내 코가 막혀서 두통이 올 때까지 울었다. 장마처럼 눅눅한 울음이 아니라, 눈이 녹는 것처럼 맑은 울음이었다. 나를 키운 사람들을 떠올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