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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공개 ・ 05.29 ・ 스포일러 포함

2025.05.28 (Wed)
이런 종말이라면 맞이해도 좋아! 너무 사랑스러운 책이었다. 지구 종말, 인류 종말에 대한 단편 6개를 묶어놓은 책. 모든 이야기가 깜찍하게 다가왔다. 나는 이런 종말이라면 다같이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 <죽이는 것이 더 낫다>에서는 읽기만 해도 살해주의에 귀의하여 사람들을 죽이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히는 이야기를 다루었다. 책이 이동하고, 그 책을 읽을 이들에 대한 기록을 따라가며 전 세계가 살해주의에 매료된 것을 서술한다. 다만 그 책의 원리나 내용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기에 이는 읽는 이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시킨다. 나라면 책을 읽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아니라고 본다. 두 번째 이야기인 <침착한 종말>에서는 갑자기 종말을 맞이하게 된 세계에 대해 말한다. 주인공 혜민은 마지막 순간에 가족들과 있거나 인공지능에 저항하는 대신, 의회 최고 위원이 썼다는 책의 다음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다. 바티칸으로 간. 인공지능들을 파괴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다른 모든 사람 대신 혜민은 최고 위원에게 닿는다. 그리고 묻는다. 책의 주인공은 어떻게 되었느냐고. 인공지능 위원은 대답한다. 다른 사람들이 쳐들어와 자신을 부수기 직전까지, 봄을 찾고 행복을 맞이한 주인공의 이야기를. 사람들은 환호하고 혜민은 뒷이야기를 알게 된다. 그리고 미처 끄지 못한 수만개의 장치로 인해 인류는, 인공지능들이 투표한 대로 멸망을 맞이하게 된다. 그럼에도 혜민은 후련했을 것이라 믿어 의심지 않는다. <캐시>는 미래를 예언하지만 사랑받지는 못할 운명을 타고난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룬다. ‘캐시’를 믿고 사랑한 것은 오직 할머니뿐이었다. 아무리 엄마아빠를, 특히나 동생을 몇번씩이고 죽을 위험에서 구해냈어도 그에게 돌아오는 말이라고는 미친년뿐이다. ’너‘는 유일하게 캐시를 사랑한 인물이다. 보육원 출신으로, 별난 애라고 겉돌던 캐시를 유일하게 사랑하고 곁에 둔 인물. 그래서 캐시의 말을 모두 들어주고 캐시에게 카산드라의 애칭이라며 캐시라는 이름도 붙여주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면 캐시가 자신이 죽은 뒤 다가올 절망적인 세상에서 캐시의 사랑이 모든 고난과 역경을 겪고도 사랑한 인물이, 캐시가 아니었다는 것. 그래서 아포칼립스 상황에서 칼에 찔려 자신의 죽음을 미리 본 캐시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단 하나였다. 나같아도, 그럴 것 같았다. 나는 질투가 많다. 캐시도 그런 편이었다. 캐시와 나는 질투를 나의 힘으로 삼아 마지막까지, 잘 살 거다. 캐시가 그랬듯이 나도. <시네필(들)의 마지막 하루>를 보면서 나는 여러 친구들을 떠올렸다. 소연이도 그렇고, 한울이도 그러려나? 요즘은 모르겠다. 버논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킥킥킥. 멸망 당일에 무얼 하려나, 하면, 사실 나는 가족들과 있다가, 전화를 좀 하고, 남자친구도 만났다가, 마지막에는 제일 좋아하는 책이나 영화를 보며 마무리하고 싶었다. 일론 머스크와 주커버그가 손잡고 안락사하러 가더라도, 톰 크루즈가 팬들과 악수를 다 해주다 팔목을 삐더라도,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보다 마무리하는 것도 참 괜찮다 싶었다. 그럼 나는 무얼 읽어야 할까? 지금부터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다. <오만과 편견>을 읽을 지, 아니면 무얼 읽을지... <멸망을 향하여>는 뜻밖에도 이 지구가 멸망하는 게 아니라 어느 게임이 섭종하는 이야기였다. ‘여명’은 제일 낮은 등급의 캐릭터로, 다른 1급 캐릭터들을 찾는 이용자가 많음에 비해 ‘여명’이나 ‘현’과 같은 3급 캐릭터들을 찾는 이들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황혼’은 ’여명‘을 진득하게 아낀다. ‘여명’은 ’멸망‘ 마지막 날, 지금껏 입력된 모든 프롬프트에도 불구하고 ’황혼‘이 행복하길 바란다는 말을 한다. ’멸망‘ 이후 다른 모든 캐릭터들이 이용자가 그들을 잊어감에 따라 모두 사라짐에도 ’여명‘은 사라지지 않는다. 비록 자신이 ’누구인지‘ 의문을 갖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황혼‘의 기억 속에 ’여명‘이 ’여명‘으로 명명되진 않더라도. ’황혼‘의 마음 깊은 곳에는 언제나 ’여명‘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명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가위바위보 세이브 어스>는 정말 사랑스러운 이야기였다. 종말 문학 단편선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이보다 좋은 소설은 없을 것이다. 사랑스러운 순아, 가위바위보에 진 적 없는 것을 제외하곤 모든 것이 평범한 순아, 그리고 어이없게도 가위바위보로 대결을 걸어온 외계인. 이 모든 것이 읽는 내내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결국 순아가 이겨서 어느 별 하나의 이름을 SoonA로 만들어버린 것까지도. 나는 인류 가위바위보 대표가 되었던 순아가 그 이후에도 여전히 배가 통통하고, 야식으로 닭발을 시켜먹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마리아를 종종 초대할 지도. 그리고 가위바위보에서 진 외계인도 지구와 상관 없이 행복하기를. 너도 사랑스러우니까. 읽는 내내 웃음이 났다. 실제로 인류가 멸망해버리든 멸망을 면하든 간에. 그래서 나도 인류가 멸망하는 날까지 그냥 지금처럼 살아야지, 했다. 출근도 하고, 대표랑 농담 따먹기도 하고, 책도 읽고 엄마아빠한테 우는 소리도 좀 하고.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도 되도록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어느 날 다 같이 없어지는 그날까지, 적당히 즐겁고 적당히 살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