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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공개 ・ 10.11 ・ 스포일러 포함

2025.10.10 (Fri)
박찬욱의 ‘정상 가족’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봉준호가 <기생충>에서 보여준 것과는 다른 대한민국의 전형적인 정상 가족. 영화는 시작과 동시에 가부장제 속에서 흔히 상상하고 볼 수 있는 가족을 그린다. 가장의 노력으로 마련한 그린 듯한 자가와 서로 사랑하는 남성-아버지와 여성-어머니, 그리고 그들 밑에서 유순하게 자라는 두 아이들. 아이 중 하나가 예체능을 하는 것까지 너무나도 완벽하다. 그러나 이처럼 가부장 신화 속에서 견고하게 세워진 가족의 탑은 가장 유만수(이병헌)가 실직함과 동시에 조금씩 무너지게 된다. 약속한 3개월이 지나도 ‘변변한’ 일자리를 찾지 못한 가장으로서 이병헌의 선택은 꽤나 참신하다. 경쟁자를 죽이는 것. 무너져가는 탑의 내부가 곪기 시작한 것도 여기서부터다. 이병헌은 이상민을 살인하려다 염혜란의 불륜을 목격한 뒤 아내 손예진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심지어 오징어인지 오진호인지 하는 의사도 연하남이란다! 설상가상으로 아들은 엄마가 돈 때문에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절도죄를 저질렀고, 딸은 첼로에 재능이 출중한 나머지 음대 교수에게 몇백을 내고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럴수록 이병헌은 가장으로서 살인을 완벽하게 해내야 했고, 그렇게 했다. 어쩔수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정말 어쩔 수가 없던 것은 손예진이었다. 사실 이병헌이 혼자 (나름) 가장으로서의 무게를 짊어지려고 버둥거리는 동안 현실적으로 가족의 위기를 극복해낸 건 손예진이었다. 좋아하던 테니스를 관두고 치위생사로 취업한 것은 물론, 아름다운 집까지 팔아치울 작정을 한 것도 손예진이었다. 아들이 친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아들 친구 아빠에게 여지를 남긴 것도, 뒷마당에서 나온 시체를 모른 척 한 것도 손예진이었다. 아들에게까지 그건 돼지였다고 말하는 모습이란! 이병헌이 무너지는 탑의 모래를 주워 담으면 손예진은 곪은 데에 약을 발랐다. 사랑스럽게 웃는 얼굴을 계속 유지하면서. 이 구도는 이상민-염혜란 부부의 가정에서도 유지된다. 실업자 남편이 술만 퍼먹고 유의미한 성과는 가져오지 않는 동안 실질적 가장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내였다. 집이 장인 것이라는 이상민의 말이나, 자기 아버지가 카페 차려준다는 것을 마다하고 왜 고생을 하느냐는 염혜란의 말은 실제로 가정 경제를 지탱하는 건 가장이 아님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남성-가장이 이끌어가는 정상 가족의 허상이 낱낱이 드러난다. 대한민국에서 가장으로서 남성이 가질 수 있는 권위는 그를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실은 가장을 대신해서 가족의 생계를 이끌어가는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여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자명한 사실이. 아니라고 딴지 걸고 싶다고? 수많은 근현대 한국 문학에서 몸 팔고 공장에 나가 가족을 부양하는 어머니, 누나, 여동생이 등장하는 것도 다 허구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이 영화는 그런 많고 많은, 우리 사회를 반영한 작품의 연장선일 뿐이다. <어쩔수가없다>는 너무나 자명하게 가부장제와 젠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사실 이병헌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다. 지금도 썩 좋아하지 않는다. 내 별명이 이병헌인 것과는 별개이다(미주는 이민정이다). 그러나 또래 중년 남배우 중 그 정도 위상에 있는 사람 치고 연기를 정말 잘한다는 것은 이제 인정해야 하지 않나 싶다. “웅앵웅 초키포키” 말하는 수많은 탑급 남배우들 사이에서 이병헌은 솔직히 대사 전달력부터가 다르다. 이번 영화를 보면서 생각했다. 이병헌만한 탑급 중년 남배우가 없다. 이건 진짜 어쩔수가없다…. 반면 이상민은 정말 좋아한다. 사실 선배라는 호칭 대신 상민 씨라고 불리는 것을 그러려니 했을 때부터 그냥 인간적으로 그 사람이 좋았는데 이번 영화에서 보여준 연기 덕분에 정말로 더 좋아졌다. 염혜란도 좋아하는 배우이고 손예진도 그렇다. 그래서 영화 보는 내내 즐거웠다. 좋아하는 배우들의 좋아하는 연기를 마음껏 볼 수 있어서.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아, 이게 영화였지, 하는 기분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영화 내내 흐르는 첼로의 선율은 이 영화가 박찬욱이 만든 것임을 분명히 한다. 약간 서슬 퍼런 영화의 색감도, 배우들의 소박한 대사도. 박찬욱 영화는 잠깐 새벽에 꾸고 일어나게 되는 꿈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