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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공개 ・ 10.20

2024.11.30 (Sat)
사과 책갈피로 옥토님을 알게 돼서 읽었는데 머릿말부터 그 당시의 내게 필요했던 문장들이 한가득이라 푹 빠졌다.. 당시의 나는 공허를 메우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거기에 얽매여 전에 없을 정도로 괴로워하다보니 아예 그 공허를 채우는 게 내 삶의 이유라고까지 생각했었다. 그러다 이 책 머릿말의 “공허를 인정해야 한다.”, “허공이라는 틈이 있어 새가 날아가듯이, 공허라는 틈이 있어 그 사이로 자꾸 빛이 쏟아진다.“ 라는 문장이 숨 쉴 구석이 되어주었다. 이 문장 하나 때문에라도 내 기억에 계속해서 남을 책이다. 사진작가이신 만큼 옥토님의 작품과 사진에 대한 철학까지 담겨있다. 사진작가가 이렇게 글을 잘 써도 되나요…? 내가 사진 이론은 아예 몰라서 새롭게 다가온 걸수도 있겠지만 사진을 찍는 이유를 ‘왜곡하고자 하는 욕망’이라 표현하신 것이 신선했었다. 사람은 그 순간을 보존하기 위해서 사진을 찍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진을 찍는 것은 흐르는 시간을 정지시켜 현재를 왜곡하는 욕망이라 표현하신 것이 너무 좋았다… 이 책을 읽고 옥토님이 너무 좋아져서 올해 8월 개인전에도 다녀왔다🥹옥토님만의 깊은 분위기와 사유가 너무 너무 좋다! 뻔한 에세이가 지겹다면 이 책만큼은 꼭 읽어보시라 말하고 싶다.
명불허전 “이옥토” 옥토피아에 영원히 잠들다.
공허를 인정해야 한다. 그 공허와 함께 긴 산책이 이어지고 있다. 이따금 공허가 채워진 것만 같고, 내가 걷고 있는 것조차 잠시 희미해진다. 충만감은 실제로 무언가가 가득 찬 감각이 아니라 그것 외의 존재들을 잠시 잊는 것이다. 문득 어떤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어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그런 망각이 생겨난다. 그 모든 것들은 그저 나를 통과해 지나가고 있는 것뿐인데도. 단지 그것들의 날숨이 풍선처럼 나를 잠깐 부풀리고 마는 것인데도. 허공이라는 틈이 있어 새가 날아가듯이, 공허라는 틈이 있어 그 사이로 자꾸 빛이 쏟아진다.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때에도 찬란히. 그러나 여기 나누어 적는다. 나와 공허와 빛의 이야기를.
머릿말
그러면 다 산 것 같다. 오만해질 때마다 나는 나를 다 이해하는 것처럼 군다. 앞으로 올 것들을 다 아는 듯이. 그래서 그것들을 포기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죽어도 되겠다. 여한이 없다. 이런 말들은 내가 삶을 도무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모를 때 나오는 표정에 가깝다.
25p, <코튼> 中
영상의 시간선은 특정 시간대를 통째로 포획하여 독자적인 타임라인을 구성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와 달리, 사진의 시간성은 시간의 정지로 나타난다. 그것의 특별함은 실제 시간이 결코 정지하지 않음에 기인한다. 정지는 자연이 아닌 사람의 욕망이다. 그렇다면 어떤 욕망인가, 왜곡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118p, <픽처>
종합하자면 사진은 일면 관찰자에게 자기 예연적-실현적 측면이 있다. 사진을 찍는 이는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신탁을 내리는 자가 된다.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마음에 선언하고 그 미래가 도래했을 때 그것을 담아 오는 것은 주술적으로 읽힐 수 있다. 어쩌면 사진은 내가 바라는 시간을 이곳으로 불러오는 주문과도 같은 노래일지도 모른다.
120p, <픽처> 中
제게는 지속 자체보다 지속을 예상하는 마음이 더 힘겨웠습니다. 내가 끝나고 나서도 이 일이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마음이요. 누군가가 당신을, 그리고 당신이 당신을 끝내지 못했으면 합니다. 당신의 슬픔보다 먼저 끝나지 말아주세요. 당신의 빛은 당신의 슬픔보다 먼저 끝나지 않아요.
161p, <메일> 中
사실 긴 산책은 매번 나를 유기하려는 시도의 실패였다. 돌아올 것을 생각하고 길을 나선 적이 없었다. 많은 것이 나를 떠났고 이제 나만 나를 떠나면 될 것 같았다. 모든 걸음과 함께 재생된 음악만이 나를 귀가하게 했다. 삶을 관통하는 절망도 잠시 망각할 수 있을 만큼 나는 이미 지독히 아름다움에 온 맘이 사로잡힌 사람이었던 것이다.
211p, <리본>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