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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공개 ・ 12.08 ・ 스포일러 포함

2025.12.08 (Mon)
톨스토이가 이 작품으로 부활시킨 것은 네흘류도프와 카츄샤만이 아니었다. 그 시절 러시아와는 동떨어진,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나와 같은 사람도 이 책을 읽음으로써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일주일이 안 되는 시간 동안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네흘류도프와 카츄샤에 대한 나의 마음이, ‘범죄자’라고 불리는 이들과 모두가 우러러보는 명예와 권력을 가진 이들에 대한 나의 시선이 서서히 바뀌는 것을 느꼈다. 그중 가장 놀라웠던 것은 나의 분노와 증오도 사랑과 용서로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의 탄생이었다. 처음 나의 분노는 네흘류도프를 비롯한 남자들을 향했다. 카츄샤로 하여금 어려운 길을 걷게 만든 것은 네흘류도프와 다른 남자들이었다. 특히나 네흘류도프가 진심으로 그의 마음을, 몸을 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카츄샤는 타락(여전히 이 단어가 맞는진 모르겠지만)의 길을 걸었다. 그래서 괘씸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징역형을 기다리고 있는 카츄샤를 보고 나서야 자기 잘못을 깨닫다니. 그것도 자신은 떵떵거리며 배심원석에 앉아서. 당연히 카츄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카츄샤와 결혼하겠다는 다짐도 자의식과잉처럼 느껴졌다. 카츄샤의 지난날에 대한 보상으로 자신과의 결혼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으로 지난 세월과 그간 그가 받은 고통에 대한 보상이 완벽히 이루어지나? 그리고 카츄샤가 그걸 진정으로 원하는지 아닌지 어떻게 확신을 하나? 한참이나 고까운 눈으로 네흘류도프를 바라보았다. 변호사를 선임하고 이리저리 청원서를 쓰는 것이 카츄샤를 위한 척 시혜적으로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한 일로만 보였다. 그러나 네흘류도프는 카츄샤를 위해, 그리고 카츄샤와 함께 수감된 다른 이들을 위해 판사와 변호사 등 고위 관료들을 만나며 실제로 정말로 생각의 변화를 겪었다. 어느 순간 네흘류도프가 진심으로 변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사유재산, 특히나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그의 믿음으로부터 나온 행동-실제로 경작하는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는 것-을 보며 느꼈다. 물론 오랜 기간 사치스럽고 여유로운 생활을 해온 네흘류도프는 자신의 것이라 여기던 많은 것을 포기하는 게 정말 맞는 일인지 고민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면모가 오히려 네흘류도프가 ‘사람다운’ 사람임을 보여주는 지표처럼 여겨졌다. 카츄샤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맑은 그의 마음이 그의 깊은 곳에 살아 있으며, 다만 방탕하고 이기적인 생활 밑에 숨겨져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네흘류도프는 카츄샤를 위해 감옥의 안과 밖을 같은 시간 속에서 경험하며 사회의 부조리함을 깨닫는다. 그러한 깨달음이 가장 잘 드러난 부분은 배심원으로서의 둘째 날, 매트를 훔칠 수밖에 없던, 자신의 죄를 시인한 청년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였다. 230쪽에서 네흘류도프는 생각한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저 청년이 특별히 악한 사람이 아니라 가장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은 지극히 분명하다. 그리고 청년이 저런 사람이 된 것은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그런 사회적 환경에 놓였기 때문이다. 이런 청년이 사회에 생기지 않게 하려면 사람이 불행하게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사회적 환경을 먼저 없애는 것이 당연한 순리다. / 그런데 우리는 무얼 하고 있는가? 저런 청년과 같은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체포되지 않고 있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우연히 우리 손아귀에 들어온 저 청년만을 감옥에 처넣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게 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지극히 위험하고 의미 없는 일을 해야만 하는 환경으로 내몬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이와 같은 사회 구조의 병폐가 100년도 더 지난 한국에도 적용된다는 것에 통탄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렀음에도 다른 나라, 다른 사회에서 동일한 부조리가 발견된다면 이건 인간의 본성인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니 인간이 너무너무 미웠다. 증오스럽고 역겹기 짝이 없었다. 약하고 위기에 처한 사람들의 사정은 생각하지도 않고 무작정 손가락질하고 처벌하는 가장 보통의 사람들이 너무 끔찍했다. 231쪽에서 네흘류도프는 다시 생각한다. ‘만약 이런 사람들에게 주는 월급 중 단 100분의 1만이라도 사회에서 버림받은 존재들을 도와주는 데 돌리면 어떨까? 우리는 우리의 안전과 생활의 편리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노동과 용역을 제공하는 사람들로만 여기고 있는 이들을 도와주자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청년을….’ 작중 추후 카츄샤가 함께 지내게 된 정치범들 중 누군가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노동의 가치가 인정받아야 한다는 의견이 지지를 받는, 공평하고 평등한 세상을 위해 부유한 이가 그렇지 않은 이에게 나누는 것에 대한 언급이 금기시되지 않는 사회가 이 책의 배경이었던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오히려 10여 년 전보다도 이와 같은 생각이 억압받고 있는 걸 생각하면 참으로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 2025년에 ‘빨갱이’라는 단어가, 그것도 누군가를 조롱하고 낙인찍기 위해 사용되고 있을 수가 있지? 힘들게 삶을 영위하고 있는 타인을 위해 내가 가진 것을 나누자는 의견이 무슨 문제가 되지? ‘자유’라는 말에 지나치게 사로잡힌 이들이 자신의 자유를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 양 굴 때마다 지친다. 네흘류도프가 관리들, 판사와 검사, 변호사와 감옥 소장, 간수, 호송병들에게 느낀 역겨움을 나도 매일같이 느끼고 있었다. 다만 나는 권력보다도 인터넷에서 손가락을 놀리며 ‘자유로운’ 의견을 배설할 권리를 가진 이들 전반에 대한, 좀 더 폭넓은 혐오감에 심각하게 지친 상태였다. 네흘류도프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된 것은 이쯤부터였다. 257쪽의 서술은 꽤나 파격적이라 놀랐다. 글의 말미에 네흘류도프가 마태복음을 읽으며 그리스도를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고려했을 때 더욱 그랬다. 사실 이건 내가 종교 전반에, 특히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무지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감옥에서 죄수들을 모아 미사에 참석하게끔 하는 장면을 그리며 톨스토이는 말한다. ‘이 미사에 참석한 그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곳에서 이루어진 모든 일들이 사실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성 모독이며 조소를 퍼붓는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사제가 들고 들어와 사람들에게 입맞춤을 시킨, 끝에 칠보 구슬을 매달아 장식한 황금 도금의 십자가는 예수가 이곳에서 그의 이름으로 행해진 이 모든 일을 금지했다는 이유로 매달려 처형당한 처형대의 모양을 본뜬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굉장히 공감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당시 이런 서술이 이단적이라고 여겨지진 않았나 궁금했다. 러시아 정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적지만 당시 러시아의 많은 미사가 이처럼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을 때, 이는 미사를 진행하는 사제들 나아가 그들이 대변하는 종교, 러시아 정교의 전반적인 형식에 대한 도전이 아니었을까? 여기까지 쓰고 작가 연보를 보는데 아니나 다를까 1899년 장편 소설 <부활>을 발표하고 1901년 2월에 러시아 정교로부터 파문당했다고 적혀 있다. 아마 이 소설 덕분이었을 것 같다. 800여 쪽에 달하는 작가정신 출판의 <부활>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책의 3/4를 조금 넘긴 뒤에 나온다. 작열하는 7월, 이송을 위해 죄수들은 뙤약볕에서 몇 시간이고 걸어야 했다. 그 결과 가장 약한 이들 5명이 일사병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유형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감옥에서 나온지 하루도 되지 않아 비참하게 죽어버린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보고도 호송 장교, 간수장, 경찰, 경찰서장, 그리고 죄수들과 아주 먼 곳에서 이를 지시한 주지사까지 많은 이들이 아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그 무엇도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에 개탄하며 네흘류도프는 635쪽에서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비록 한 시간만이라도 그리고 아주 예외적인 어떤 한 경우에 국한된다고 할지라도 인간을 사랑하는 감정이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그러면 범죄가 없을 텐데.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죄를 짓고도 자기는 죄가 없다고 여기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을 텐데.’ 이미 여기서 네흘류도프는 부활을 예고하고 있었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사랑! 다른 이를 가엾게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하다면 범죄에 대한 선고도, 범죄도 없을 것이다. 심판받을 이도 심판할 이와 동등한 인간임을 안다면, 그러므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심판할 권리가 없음을 깨닫는다면! 어째서 누군가는 남들보다 돈이, 땅이 많다는 이유로 그들 위에 군림하는가? 돈과 땅이 있으면 권력이, 또 권력이 있으면 돈과 땅이 생긴다는 걸 아는 사람들은 욕심내는 것을 멈추지 못하고 더욱 긁어모으려고 한다. 그럴수록 가진 이는 더 갖게 되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더 가난해진다. 그리고 가진 이의 그렇지 못한 이에 대한 착취도 점점 더 당연한 것이 된다. 이게 다 욕심 때문이다. 그렇다면 욕심을 내지 못하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소유할 수 없게, 토지라든가 하는 것을 소유할 수 없게 한다면… 그 무엇을 한계 짓지도 그 무엇으로부터 한정 받지도 않는 그 노인처럼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쓰고 보니 아직 나는 분노 대신 사랑을, 증오 대신 용서를 실천할 준비가 안 된 것도 같다. 깨달음과 행동하는 것은 역시 많이 다르구나. 반성 또 반성. 비록 네흘류도프는 카츄샤와의 결혼이라는 맨 처음의 목표를 이루진 못했다. 카츄샤 역시 네흘류도프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음에도 그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시몬손을 택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라는 타인을 위한 변화가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변화를 겪었다. 그리고 부활했다.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네흘류도프는 카츄샤와 결혼하지 못했으나 좌절하지 않았다. 대신 카츄샤와의 재회, 그리고 그 이후로 겪고 깨달은 모든 것으로부터 더 많은 사람을, 가장 인간다운 인간들을 위하고 사랑할 미래를 향해 나아가며 이야기가 끝이 난다. 책은 여기서 끝났지만 네흘류도프의 삶은 이제 다시 시작이라는 것을 안다. 카츄샤도 그렇다. 그리고 나도, 이 책을 통해 부활을 겪은 나 역시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준비가 된 것 같다. 사랑으로 가득한 새로운 삶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