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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공개 ・ 01.02

2026.01.01 (Thu)
메마른 입술을 타고 미지근한 차가 흘러갔다. 반비례하게 축축한 손으로는 책을 젖게 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불 땐 방에서 저 바깥의 영하 10도보다 시려운 콧속을 느끼며 나는 양극단과 그 사이를 논하는 허수경 시인처럼 나도 시를 쓸 수 있을까? 생각한다. 그렇지만 내 상상은 빈약해서 한 손에는 빠진 머리카락을 다른 손에는 빈 찻잔을 들고 머리카락 달인 물을 마시는 것이 까짓것. 어느 먼 나라, 테러가 일어나고 난민들이 오다가 죽는 나라를 거닐던 이방인 시인을 떠올리며 나도 꼭 한 달 뒤에 낯선 그곳에서 이 책을 읽을 걸 후회를 했다. 좋아하던 늙은 교수님은 회색을 미워하지 않았다. 어린 나는 흑도 백도 아닌 모호함을 지향하는 교수님이 못마땅했고 교수님은 그럼에도 나를 좋게 봐주셨다. 학교를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회색의 가치를 이해하게 된 나는 부끄러워 그 교수님께만은 연락을 드리지 못했다. K 교수님 스스로도 K 교수라고 부르던 그 교수님을 떠올린 건 이 책이 회색이었기 때문이다. 회색 낯빛으로 건조하고 무심한 독일을 걷는 허수경 시인을 상상하며… 한편으로 나 역시 더운 그곳에서 무심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니 그럴 수는 없을 것만 같다. 여전히 추운 코 더운 손바닥을 느끼며 나는 시인을 부러워한다. 당신이 살지 않은 몇 년을 더 살아온 나를 한심해하다가 엄마가 들고 온 동생의 옷을 보며 이번에는 또 동생을 질투한다. 질투는 추한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지만 나는 왜 이렇게까지 추할까. 언젠가는 사랑했던 친구가 좋은 시를 많이 읽는 해가 되길 바란다며 생일 선물로 시집을 주었다. 몇 년이 지나 그 친구의 생일에 맛있는 커피를 많이 먹는 한 해를 보내길 바라, 라고 했더니 좋아했던 게 생각난다. 몇 년 전에 준 시집에 대한 답장인 줄 죽어도 모를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도 여전히 이 책을 추천했던 것 같은 너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여전히 너를 부러워하고 좋아하고 너처럼 되고 싶어하는 것을. 사랑과 동경이 시기와 질투를 동반하는 일은 너무너무 흔하다. 그 친구를, 동생을, 수많은 시인을 나는 그렇게. 이제는 정말로 기형도 시집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손금을 타고 흐르는 잿빛 땀을 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