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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공개 ・ 01.05

2026.01.01 (Thu)
문장력은 5점 만점에 100점인데 스토리는 5점 만점에 3점이랄까… 하지만 문체가 정말 내가 구사하고 싶은 문장의 이데아임 특히 도입부는 진짜 탑오브탑 메인 스토리보다 곳곳에 담긴 ‘읽기’라는 행위에 대한 사유가 좋았고, 나는 이것만으로 18000원 값어치 충분히 했다고 생각하지만 만연체 불호인 사람들에게는 추천못함 특히 생소한 단어가 진짜 많다 분요, 영연하다, 파안, 궁륭, 참괴 등등… 총 21개의 단어를 옮겨적고 공부했슨 이 역시…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평생 알지 못할 지식을 얻고 있는 게 좋아서 재밌게 사전 뒤졌지만 책 읽고 단어 찾고 책 읽고 단어 찾는 게 불호라면 진짜추천못함 아무튼 구병모님 옛날 인터뷰에서 “가독성 신화에 저항하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었는데 난 이 점이 극극극호였다 개인적으로 읽기 어렵다거나 불필요하다 느껴질 정도의 만연체는 아니었고 오히려 구사하는 어휘 하나하나에 깊이가 느껴져서 좋았다
거듭된 곡해 속에 난파된 말들의 바다 한 가운데에서도 뗏목의 파편 하나를 발견하여 올라타는 것을 가리켜 우리는 사람 사이, 즉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63p
사람 사이로 범람하는 급류 한가운데 놓인 다리의 안정성과 길이를 우리는 알 수 없으며 다리가 끊어졌거나 애초에 다리 따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 사이를 건너서 다가가야 할 때도 있고 채워야 할 때도 있는 한편 그것이 사이임을 모르는 채 사이를 두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 사이란 파헤치고 들쑤시는 방식으로만 좁히거나 파악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63p
그렇잖습니까. 하지 말라는 걸 해야만 비로소 세상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이치를. 이야기의 배태란 일상의 붕괴와 질서의 와해 그리고 소망의 파탄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만한 시기는 아니니까요.
11p
말하기에 필요한 것은 일차로 청자의 존재이고요. 말하기와 듣기, 쓰기와 읽기란 비록 그것으로 인해 변하는 실재가 없음은 물론 그것이 거쳐가는 길이 모순의 흙과 불화의 초목으로 닦이고 마침내 도달하는 자리에 결핍과 공허만 남아 영원한 교착상태를 이룬다 한들, 그 행위가 한때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누군가의 영혼이 완전히 부서져버리지 않도록 거드는 법입니다. 언어의 본질과 역할을 두고 명멸하는 무수한 스펙트럼 가운데 그것만큼 괜찮은 구실이 또 있는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41p
네가 읽은 것에 대해 생각하면 돼. 좋고 싫고 같은 것 말고 생각을 하라고.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과 판단과 응용. 작가는 왜 인물의 감정을 안 보여주고 인물이 바라보는 풍경만 실컷 펼쳐놓고 지나가버릴까 하는 것. 지금 우리가 여기 있는 건 이 장면이 슬프다던가 이 서술이 불쾌하다는 호불호 차원의 감상을 나누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슬픔이 어디에서 비롯하는지 그것을 둘러싼 배경을 분석하고 그 염오가 발휘하는 효과는 과연 무엇인지를 다각도로 생각하기 위해서야……
62p
- 그애는 나의…… 질문입니다. (…) - 나한테 주어진 지극한, 가장 어려운 질문입니다. - 대답은 없는 건가요, 그 질문. - 원주율의 마지막 숫자가 뭔지 아십니까. - 그렇군요. 그걸로 최소한 티끌이나 그을음 이하의 존재는 아님을 가까스로 알 수 있었습니다.
65p
애초에 책을 읽는다는 것은 샛길로 빠져서 미지의 숲을 거닐다 때로는 기꺼이 길을 잃는다는 일이라ー
163p
그런데 이유를 알면 뭐가 좀 달라지나. 이유가 명백하면 그가 해온 짓이 악행이 아니게 되나. 최소한 이해와 동정이 가능한 범주로 굳히기에 들어가기라도 하나. 세상에 차고 넘치는 게 각자의 사연이며 자신의 마땅한 근거를 갖지 않은 사람 하나 없다고 지난 시간에 선생님은 말씀하셨지. 나는 그래, 세상에는 어떤 이야기도 부여받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 있다고 믿어. 물론 나를 포함해서. 그러나 선생님이 내 이야기를 지금까지 잠자코 들어주셨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런 믿음 또한 모순이겠지. 그러니 조금 다르게 말해볼게. 이야기가 존재하고 그 이야기를 알고 나서 혹시라도 오언을 이해하게 되어버리기도 한다면,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고. 그래서 나는 가장 중요한 물음을 처음부터 건네지 않고 내내 외면했다고.
287p
상처는 사랑의 누룩이며, 이제 나는 상처를 원경으로 삼지 않은 사랑이라는 걸 더는 알지 못하게 되었다. 상처는 필연이고 용서는 선택이지만, 어쩌면 상처를 가만히 들여다봄으로 인해, 상처를 만짐으로 인해, 상처를 통해서만 다가갈 수 있는 대상이 세상에는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344p